사회를 듣는 귀

자기계발서와 노숙인, 선별적 복지를 지탱하는 심리적 저항

너의길을가라 2013. 12. 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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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 힐링이 아니라 일시적 진통제 불과 <아이뉴스24>

 

여전히 '자기계발서'라는 상술이 버젓이 판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 흐름이 조금 바뀌었다. 인식의 전환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고 할까? 자기계발서는 끊임없이 '문제는 너야'라며 최면을 건다.

 

'5분만 일찍 일어나도 세상이 바뀌는 걸?'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보면 어때?'

'긍정적인 마인드로 사람들을 대해 봐'

'계획을 짜고, 체계적인 생활을 해봐'

'더 노력해. 지금 네가 가난한 것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물론 '자기계발서'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노력들이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계발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의 부조리를 모조리 개인의 것으로 밀어넣는다는 것이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이제 사람들은 '나'를 바꾸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공감대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물론 '머리 속에서' 말이다.

 

이제 거리로 나가보자. 지하철이 좋겠다. 버스 터미널도 좋다. 기차역도 무방하다. 그 곳에서 우리는 불편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노숙인'들이다. 흔히 우리가 쉽게 '거지'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 말이다.

 

 

- <뉴시스>에서 발췌 -

 

 

자본주의 비효율, 노숙인과 인문학이 만나다 <한겨레21>

 

'자기계발서'의 거짓말에 대해 실컷 이야기하고 머리 속으로 이해했지만, 실제로 '노숙인'을 마주하면 다시 '자기계발서'의 마법에 휩싸이고 만다. 노숙인을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그들의 존재 자체에서 '더러움'을 느낀다. 노숙인을 보호하고, 재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왜 내가 낸 세금을 '삶의 의지'도 없는 자들에게 써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아니, 짜증이 난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까?

 

왜 세금을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지 않을까?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나는 죽어라 힘들게 일하는 데, 이런 노동과 노력은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있을까?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보편적 복지'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이러한 '덫'에 빠지게 된다. 본래 '선별적 복지'라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지를 하자는 것인데도, 그 가난한 사람들의 범위 안에 '노숙인'들을 제외시키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든다. 본래 '선별적'이라는 말에서 '배제'의 논리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걸까?

 

'보편적 복지'를 말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현실 앞에는 당장 말문이 막힌다. 물론 정신을 차리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따뜻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설득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심리적 거부감은 내재되어 있다.

 

 

일전에도 인용한 적이 있는데, 마이클 센델은 『도덕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복지에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회복지에 소비되는 돈을 아깝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보상을 수여하는 기준과 관련해 사회복지에 담긴 메시지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베풂'을 근거로 사회복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바로 그 점을 간과할 때가 많다. 소득이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시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의 척도 역할까지 한다.


'열심히 일하며 규칙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자신이 흘리는 땀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진다. 물론 사회복지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가 공정성과 자격, 의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 <연합뉴스>에서 발췌 -

 

보편적 복지로 나아가든, 기본소득제를 시행하든 간에 우리는 '선별적 복지'를 극복해야 한다. 그 강고한 논리는 단지 '부자에게도 복지를 해줄 필요가 뭐가 있어, 가난한 사람부터 챙겨야지'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상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도 내재되어 있다. 필자는 오히려 후자 쪽이 '선별적 복지'를 지탱하는 훨씬 더 강력한 버팀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심리적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장하준 교수는 "선별적 복지론자는 한정된 재원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게 더 효과적이다고 한다. 단기적으로는 맞다. 선별적 복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행정비용이 필요하다. 육아수당 같은 경우 차라리 다 나눠주는 것이 행정비용을 줄여 더 많이 줄 수 있는 방법이다" 라며 보편적 복지의 경제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역시 꼼꼼하게 따져보면, 보편적 복지가 옳다. 장기적인 복지 국가 건설을 위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본적 틀은 '보편적 복지국가'다. 문제는 앞서 살펴봤던 심리적 저항이다. 머리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마음의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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