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시위와 집회, 저항의 모습들.. 다시 나꼼수 이전으로 회귀?

너의길을가라 2013. 12. 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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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필자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특유의 '발랄함' 때문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 '경박함'이 되곤 했지만, 그동안 야권(을 넘어 정치가)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박수쳐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 4월 29일, 서울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 트랙구장에서 열린 '용민운동회'의 모습 -



'나꼼수'의 핵심은 '쫄지 않는 것'이었고, 거대한 권력의 뒷다리를 거는 '제리'의 얄미움이었다. 그리고 '즐거움'이었다. 정치가 무겁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 '예능'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시위나 집회가 엄숙한 '부담'이 아니라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이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가령, 지난 4월에 있었던 '용민 운동회'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7월에 있었던 봉도사 사면 촉구 맥주파티는 어떠했는가?





- 7월 28일,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 나꼼수의 정봉주 전 의원 석방촉구 맥주파티 '취중봉담'의 모습 -



권력에 대한 기존의 '저항'의 이미지는 '빨간띠'와 '엄숙함' 같은 것들이었다면, '나꼼수' 이후에는 '놀이', '즐거움', '이벤트'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게 됐다. 눈물이 아니라 웃음, 그것도 경쾌한 웃음이 자리하게 됐다. 문제는 '나꼼수'의 해체(?) 이후에 다시 분위기가 과거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물론 2008년 촛불 집회 이후에 시민들이 참여하는 자발적 시위와 집회에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남아있지만, 그 외의 시위나 집회는 한없이 엄숙하고 무겁기만 하다.



- <오마이뉴스>에서 발췌 -



- <뉴스1>에서 발췌 - 



정부의 정당 해산 청구에 저항하는 통합진보당이 보여준 모습들은 어떠했는가? 삭발과 단식.. 이게 어느 시절의 저항 방식인가? 이러한 방법들은 스스로를 각성시키는 효과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민들의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오히려 비아냥만이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시대착오성이 낳은 당연한 결과다. 사안의 중대성이나 시급함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절망스러운 표정를 지으며 단체로 머리를 깎고, 울고 불며 심지어 단식까지 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패배자'의 것이었다. '결기'를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함이었을까? 과연 저 구시대적 퍼포먼스는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필자는 진보당의 저항 방식을 보면서 저들은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 <뉴스1>에서 발췌 - 


- <뉴스1>에서 발췌 - 



전교조가 보여주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저 어김없이 등장하는 '빨간띠'와 경직된 얼굴과 목소리. 무겁고 엄숙하다. 부담스럽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탄압이 지나치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가까이 가기엔 너무도 먼 당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보당의 외침이, 전교조의 외침이 '그들만의'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선 많은 시민들이 함께 외칠 수 있는 '판'을 마련해야 한다. 


익숙했던 방식들과 결별해야 한다. 노조는 왜 항상 '빨간띠'를 머리에 둘러야 하는가? 지금 이 시대에 삭발과 단식으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왜 항상 해왔던 대로 싸우는가? 그 승률이 얼마나 높기에 고집하는가? 


적어도 필자는 '저항'의 모습이 혹은 '진보'의 모습이 전반부의 것이길 바란다. 싸우더라도 후반부의 우울한 모습들은 아니길 원한다. 단언컨대, 이길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우는 것이 아니라 웃는 것이다. 

 


P.S.


이 글을 읽고, 또 다시 엄준한 태도로 꾸짖으려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분들께는 박홍규 교수의 말을 대신 전한다.

 

'계급이니 체제이니 하는 것에 묻힌 사람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전체주의자들인지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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