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 연예/드라마 톺아보기

'우리들의 블루스' 눈물겨운 아빠, 한수의 헌신

너의길을가라 2022. 4. 21. 13:35
반응형

전근 준비를 위해 짐을 옮기다가 발가락을 소파에 찧었다. 눈앞이 핑 돌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새빨간 피가 양말에 스며들었다. 아무래도 발톱이 들린 모양이다. tvN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수(차승원)는 이를 악물고 발톱을 떼어냈다.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발톱이 빠져 드러난 속살을 보며 한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이 전근이지 사실상 좌천이다. 그런데 하필 제주라니! 한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 없었다. 제주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수학여행을 가려면 들깨를 시장에 팔아 돈을 마련해야 했다. 농구가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알아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농구선수? 가난한 집 2남 3녀의 장남에게 꿈은 사치였다.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 했다.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 제주를 떠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흥미는 없었지만 다행히 재능은 있었다. 공부를 곧잘 한 덕분에 한수는 서울로 떠나올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은행에 취업했다. 영업 실적이 좋아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지점장 타이틀을 얻었다. 대학교 때 만난 미진과 결혼 후 낳은 딸은 골프에 재능을 보였다.

반응형

"골프를 왜 포기해? 13년간 골프만 친 놈이 골프 포기하고 뭘 하려고. 네가 돈 걱정을 왜 해. 내가 너한테 돈 벌어달라고 했어? 돈은 아빠가 어떻게든 마련해." (한수)


그런 한수에게 '좋은 부모'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딸에게 어떤 아빠로 기억되고 싶었을까. 그건 바로 자식이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경제적으로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부모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녀의 꿈을 미리 알아주고 응원해주는 부모, 어떤 경우에도 자녀보다 먼저 포기하지 않는 부모가 되고 싶었으리라. 딸의 도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건 그 때문이었다.

한수는 기러기 아빠를 자처했다. 살던 아파트를 팔고 빚까지 내서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지점장 연봉으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염치 불고하고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도 손을 벌렸다. 자존김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슴을 설레게 했던 꿈을 포기한 채 먹고 살기 위해 은행원이 되어야 했던, 퍽퍽하고 건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신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다.

딸은 입스(Yips, 골프에서 스윙전 샷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생하는 각종 불안증세) 때문에 심각한 부진에 빠져 있다. 성적은 뚝 떨어졌다. 결국 2부 리그에서 간신히 뛰는 처지에 몰렸다. 입스를 치료하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 부모의 경제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딸은 골프를 그만두겠다고 하지만, 한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라니! 받아들일 수 없다.

"보람이도 나도 골프 포기했어. 이젠 당신이 포기할 차례야. 더는 이렇게 거지처럼 초라하게 망가져가면서 못 있어." (미진)

아내와 딸은 더 이상 못하겠다며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선언했다. 어쩌면 포기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다. 딸의 성공만이 유일한 희망 같아서 차마 물러설 수가 없다. 딸의 실패는 곧 자신의 실패이고, 자신의 능력 부족을 시인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제주에서 만난 옛친구 은희(이정은)에게 '마수'를 뻗었다.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은희에게 아내와 별거 중이고 곧 이혼할 거라며 바람을 넣었다.

은희의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고 싶었다. 딸의 꿈을 위해, 딸의 행복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다. 한수는 은희에게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했다. 수학여행의 추억이 깃든 목포에서 은희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골프가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딸의 애원은 한수를 무너뜨렸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걸까. 딸이 행복하지 않다면 나의 헌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한수에게 아내의 전화가 걸려왔다. 딸과 함께 공항에 왔고, 한국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라는 얘기였다. 한수는 알 수 없는 후련함을 느낀다. 더 이상 추잡하게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된다. 친구를 잃지 않아도 된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공항에서 상봉한 한수는 당분간 가족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홀가분했다.


한수는 헌신적인 아빠다. 그의 모습은 자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삶을 내던졌던 우리 부모 세대의 전형이다. 혹자는 부모가 자녀를 지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수 부부처럼 할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한수의 제주 친구들 말마따나, 앞선 시대의 많은 부모들은 '분수'를 알고 애당초 골프같이 돈이 많이 드는 꿈을 꾸게 하지 않으니까.

혹자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진 것이라 쉽게 말할지도 모른다. 포기하지 않는 모든 여성 골퍼가 박세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딸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아빠가 박준철 씨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 부모된 마음이란 무엇일까. 한수의 헌신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꿈을 못 이뤘기에 자식의 꿈을 지켜주고자 했던 우리네 부모의 삶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방향은 나 자신이다. 내가 한수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결정을 할까. 나는 내 자녀의 꿈을 외면할 수 있을까. 내가 먼저 포기할 수 있을까. 한수라는 캐릭터에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했던 건, 아마도 같은 대답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