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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쏟아진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을 추앙하라

너의길을가라 2022. 4. 13. 17:56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어렵다. 말이 그러하고,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극본은 '지문'보다 '대사'가 훨씬 많다. 불필요한 대사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될 상황까지 일일이, 인물의 입을 통해 설명한다. 표정과 행동으로 충분히 드러날 감정까지 구구절절 말하게 한다. 연출을, 배우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앞선다. 결국 자신의 글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백'을 비어진 상태 그대로 두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tvN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로 필력을 인정받은 박해영 작가는 공백을 겁내지 않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의 극본에는 공들여 새긴 여백이 많다.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 조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연출과 배우들은 그 빈칸을 압축적으로 채워나간다. 명대사가 즐비하고, 명연기가 쏟아진다. 드라마 보는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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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지현아)



박해영 작가의 신작 JTBC <나의 해방일지>는 절제되어 있다. 대사가 많지 않아 "한 마디 한 마디가 귀한데", 그 절제 속에서 '쓸데있는 말'이 귓가에 쏙쏙 박힌다. <나의 해방일지>는 '견딜 수 없이 촌스런 삼남매의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운 행복소생기'이다. 경기도 남쪽, 수원 근처 산포시(가상의 지명)에서 살아가는 염기정(이엘), 창희(이민기), 미정(김지원) 남매의 이야기다.

<나의 해방일지>에는 '소외된 이들'이 등장한다. 삼 남매는 모두 경기도민(으로 수원 근처라고 부연해야만 사람들이 알아듣는 시골)인데, 창희의 전 여자친구는 경기도를 노른자(서울)를 감싸고 있는 '(계란)흰자'라고 표현한다. 스스로를 촌스러움의 경계선 상에 있다고 여기는 창희는 이별의 순간, 전 여친이 내뱉은 "견딜 수 없이 촌스러워."라는 말에 견딜 수 없는 모욕과 자괴감을 느낀다.

"아무한테나 전화와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대화인데, 말인데, 쉬는 것 같은 말. 섹스라고 하지만, 사실 나 남자랑 말이 하고 싶어." (기정)



밝을 때 퇴근해도 집에 도착하면 밤이 되는 장거리 이동은 남매를 끝없이 지치게 한다. 물리적 거리는 곧 심리적 거리를 만들어내고, 삶의 의욕도 원동력도 서서히 떨어진다. 기정은 서너 시간씩 길 위에 버려가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삶에 진저리가 난다. 이러다가 폭삭 늙어버릴 것만 같다. 자신의 삶이 저물어 버릴 것 같다. 그래서 아무나 사랑하기로, 뜨겁게 사랑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아무나' 사랑하기가 어디 쉬운가. 스스로를 '매력자본이 어마어마한 여자'라고 여기는 기정은 남자가 없다며 푸념한다. 기정이 말하는 '아무나'는 사실 '말이 통하는' 아무나일 게다. 동네 친구 현아는 그런 기정에게 "자기가 80점 이라서 80점 짜리를 찾는거면 내가 이해를 해. 언니 솔직히 몇점 짜리 인지, 오늘 내가 적나라하게 얘기해 줘?"라며 타박한다.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미정)



미정에게는 "모든 관계가 노동"이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재주가 없고, 집이 멀어서 회사 내 동아리 활동도 할 수 없다. 전 남친에게 돈을 빌려주고 대출을 떠안은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어렸을 적 '들키지 말아래 할 20점짜리 시험지'라고 생각하며 한없이 우울해진다. "해결은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삼 남매는 해방을 꿈꾼다. 삼 남매뿐이랴. <나의 해방일지>의 모든 인물들이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자신만의 해방을 좇는다. 첫 타자는 미정이다. 꾹꾹 참고 또 참던 미정은 결국 폭발하고 만다. 아빠 염제호(천호진)의 일손을 돕는 구 씨(손석구)는 술이 없으면 하루를 나지 못하는, 경기도민보다 더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인데, 미정은 구 씨에게 다가가 "나를 추앙해요."라고 제안한다.

"우리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미정)



<나의 해방일지>는 박해영 작가의 전작인 <나의 아저씨>처럼 고독의 정서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 안에 유머가 녹아 있어 부담스럽지 않다. <나의 아저씨>가 중년의 공동체를 그려냈다면, <나의 해방일지>는 청춘의 공동체를 그려나간다. 중심축인 이엘, 이민기, 김지원은 단단하면서도 매력적인 연기를 펼치고, 손석구는 대사량이 적음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이고 있다.

비움의 미학이 돋보이는 극본과 연출, 공백을 촘촘히 채우는 배우들의 연기가 잘 어우러진 <나의 해방일지>의 시청률은 첫회 2.941%, 2회 3.018%로 소폭 상승하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흰자'의 삶을 살아온 삼 남매의 '해방'이 어떤 식으로 이뤄질까. 소외된 이들의 폭발이 전해줄 웃음과 공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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