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어째서 법관을 우러러 봐야 하는 걸까요?

너의길을가라 2014. 1. 5.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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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司法) 서비스(service). 국어사전에 등재(登載)되어 있지 않지만, 이제는 워낙 익숙한 단어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사법 서비스'를 치면 수많은 논문과 기사들이 쏟아진다. 그렇다. '사법'이 '서비스'란다. 국민을 위한 서비스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국민들은 '사법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정말 질 높은 '사법 서비스'를 받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법원으로 한정한다.)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2012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국민들의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고작 15.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가 5.6%를 받은 것에 비하면 엄청 높은 수치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낙제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법원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뜻이며, '사법 서비스'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다음의 사례들을 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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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마약 먹여 결혼" 막말판사 징계위 회부 <뉴시스>

대법, "늙으면 죽어야지" 막말판사 견책 처분 <뉴시스>

대법원, "여자가 말이 많아" 막말판사 사표 수리 <뉴스토마토>


(1) "초등학교 나왔죠? 부인은 대학 나왔다면서요. 마약 먹여서 결혼한 것 아니에요?"

(2) "늙으면 죽어야한다"

(3) "(여기에) 남편 분도 있고 변호사도 있는데 여자분이 왜 이렇게 말씀이 많으세요"

(4) (변호인에게)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위에서 인용한 어처구니 없는 발언들은 법정에서 판사들이 피고인 또는 변호인에게 한 것이다. 소위 '막말 판사'들의 케이스다. 이런 일들이 잊을 만 하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답은 간단하다. 판사들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들이 권위적인 태도를 갖는 이유도 간단하다. 판사는 그래도 된다고 사회가 가르쳤기 때문이다. 




- <아츠뉴스>에서 발췌 -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부터 한 번 뒤집어보자. 혹시 재판을 참관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선,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세팅'이 이뤄진다. 검사를 비롯해 피고인과 변호인이 자리에 위치하고, 참관인들도 각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리고 한참 후에, 멋진 법복을 갖춰 입는 판사가 입장한다. (그 법복은 혼자 입을까?) 그리고 법정에 울려퍼지는 한 마디, '일동 기립!' 재판의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참관인들까지도 판사를 영접한다. 


몇 년 전에 재판을 참관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법정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을 보면 문득 궁금한 것들이 생겼었다. 근데,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국민들을 위해, 수준 높은 사법 사법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노력한다면서? 법관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되는 걸까? 아, 법관들은 과중한 업무에 지쳐 피곤하기 때문에 이해해 달라고? 그 뿐만 아니다. 법관들의 자리를 살펴보자. 높다. 법관은 내려다고, 시민들을 우러러봐야 한다. '시선'은 곧 권력이다. 아, 법관은 법정 전체를 파악하고 관장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하라고? 


조선시대에는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사또가 고을도 다스리고 재판도 관장했다.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던 시절이니, 사또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고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백성들은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나으리, 저는 억울하옵니다. 살려주시옵소서!" 근대적인 법 체계가 확립된 유럽 역시 다를 바 없다. 그 시스템이 유럽의 법이 일본과 미국으로 전해졌고, (물론 영미법계과 대륙법계의 차이는 있지만 기초적인 부분은 같다) 그것이 다시 우리에게로 흘러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법관과 시민들의 관계는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무죄인 피고인도 판사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변호인도 마찬가지다. 한 중견 변호사의 푸념을 들어보자. "법정에서 판사들이 혼잣말처럼 툭툭 던지는 말 가운데는 불쾌한 언행이 섞인 경우가 아직도 많다. 모멸감을 느낄 때가 적지 않지만 혹여 재판 결과에 악영향이 갈까봐 꾹 참는다


법관은 (과거에는 그랬을지언정) 신분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기술적으로 법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이 공부했고, 그렇기 때문에 능통(能通)할 뿐이다. 시민들은 법관에게 판결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 측과 변호인 측의 주장을 잘 듣고, 제대로 판단을 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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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사법 서비스'를 강화하겠다면서, '국민의 소리도 귀 기울여 듣는 열린 법원을 만들겠다'고 말하지만 바뀌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벌이 '세습'되고 있는 사회에서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고 살아온 사람이 판사가 되고 곧장 법원으로 직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이해할 리가 만무하며, 피고인과 변호인의 입장을 생각해봤을 리가 없다. 


현재의 사법 시스템으로서는, 이를 넘어 현재의 교육 체제 속에서는 불가피한 문제들이다.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은 실질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결국 주변적(周邊的)인 방법을 통해 '개혁'의 몸부림이라도 쳐볼 수밖에 없다.


"생중계 재판이 막말판사 막는다" 국내 첫 연구보고서 나와 <조선일보>


예를 들면, 재판을 생중계 하는 방안 등을 확대 적용하는 방안들이 있다.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한동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재판을 생중계함으로써 판사들의 고압적인 언행이나 편파적 태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 변협 소속 플로이드 에이브람스 변호사도 "부패한 검사, 지나치게 판사에 밀착된 변호사, 졸고 있는 판사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재판 생중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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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현재 법원에서 자구책으로 내놓고 있는 사법 서비스 개선 방안들처럼 법관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거나 시민들과의 만나서 소통할 수 있는 장(場)을 많이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단기간에 효과를 보긴 어렵겠지만, 이런 과정들이 조금이나마 법관들의 사고가 유연해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사고도 변해야 한다. 물론 법이라는 것이 어렵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선 안 된다. 이는 정치에 무관심하면, 정치'꾼'들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간을 내서 재판을 참관하기도 하고, 각종 창구를 통해 법원 혹은 법관들의 문제들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 등 '법' 자체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하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여러 방향에서 압박해야 한다. 고인 물이 썩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재판을 원활히 진행해야 한다는 이유 하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물리적 시선의 간극이 어느새 심리적 간극으로 변하고, 이것이 권력 관계가 되어 버린 법정..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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