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 시사교양

'꼬꼬무'가 들려준 전태일, 몸을 불태워서라도 하고 싶었던 말

너의길을가라 2021. 12. 17. 14:10
반응형

1970년 11월 13일, 20살 청년 김영문 씨는 다급하게 택시에 올라탔다. 이동하는 내내 초조해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하지?' 친구가 크게 다쳐 위독한 상황, 김영문 씨는 친구의 어머니에게 안타까운 비보를 전하러 가는 길이었다. 쌍문동 208번지, 친구의 집에서 만난 어머니는 뭔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병원에 도착한 어머니는 참혹한 상태로 병실에 누워 있는 아들을 마주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붕대가 감겨 있었다. 화상으로 인한 상처 때문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겨우 입을 뗀 아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죽음을 직감한 듯했다. 어머니에게 '약속'을 지켜달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은 후 아들의 숨이 끊어졌다. 죽는 순간까지 간절했던 그 약속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1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당시를 함께한 친구들의 증언과 함께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대문 평화시장은 60~70년대 패션의 메카였다. 당시는 맞춤옷에서 기성복으로 기상복으로 전환되던 시대였다. 평화시장에는 400개 이상의 봉제공장이 밀집해서 들어섰다. 수많은 청춘들이 일자리를 찾아 평화시장으로 몰려들었다.


김영문(20), 이승철(22), 최종인(22)도 마찬가지였다. 평화시장의 잘 나가던 재단사였던 세 친구의 꿈은 자신의 가게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를 만나면서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그의 이름은 바로 전태일이었다. 첫 만남은 매우 강렬했다. 남다른 포스의 전태일은 친구들을 데리고 방송사를 찾아가서 평화시장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고발했다.

비록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전태일의 강단있는 태도와 카리스마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열 명이 넘는 재단사들이 다방에 모였고, 전태일의 주도하에 '실태조사를 해서 평화시장을 바꿔보자'고 결의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봉제공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기록에 나섰다. 당시 평화시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평화시장 1층은 매장, 2층과 3층은 공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1층은 손님들을 맞는 공간이다보니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하지만 2, 3층은 어두컴컴했고, 옷감에서 진동하는 석유 냄새와 엄청난 먼지로 가득했다. 400개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무려 만 명이나 됐다. 그런데 충격적인 건 환풍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전해듣던 차선우, 정문성, 효정은 기겁했다.

반응형


최악은 따로 있었다. 봉제공장은 한 층을 복층으로 개조해서 썼는데,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2형에서 13명, 7평에서 30명이 일하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이 곳을 '닭장'이라고 불렀다. 당시 여공에 작성한 설문지에 따르면, 1일 근무 시간은 약 14시간에 달했다. 퇴근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막차 시간이 곧 퇴근 시간인 셈이었다. 휴일은 1개월에 2일뿐이었다.

그중 가장 최악의 대우를 받았던 사람은 소위 '시다(견습공)'였다. 견습공은 대부분 12~15세 소녀들로, 재료 운반이나 다림질을 비롯해 온갖 잡자한 심부름을 담당했다. 그들의 근무 시간은 가히 살인적이었는데, 무려 약 100시간에 달했다. 하지만 월급은 1800원에서 3000원에 불과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100원이었으니 하루 일당이 짜장면 한 그릇값이었던 셈이다.

전태일은 대구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전태일은 순덕이와 엄마를 찾아 서울행 기차를 탔다. 엄마를 찾아 헤매다 남대문 시장에서 노숙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시장 앞을 지나다 구인 광고를 보고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월급은 적지만 안정적인 일자리에 기뻤다. 얼마 후 가족들은 다시 함께 살게 됐다.

쌍문동 208번지, 공동묘지 위 무허가 판자촌이 전태일의 집이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함께 산다는 게 마냥 행복했다. 부지런하고 실력이 좋았던 전태일은 어엿한 재단사가 됐다. 월급도 올랐고 꿈에 부풀렀다. 열심히 재단하고 있던 그날, 앞에 앉은 여공이 기침을 시작하더니 피를 토했다. 그런데 여공은 사장님한테 말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쫓겨난다는 게 이유였다.


전태일은 몰래 여공을 병원에 데려갔다. 하지만 이미 폐가 망가진 상태였다. 사실 평화시장에서 각혈은 흔한 일이었다. 영양실조에 과로로 몸이 망가졌고, 하루종일 섬유 먼지를 들이마시니 폐가 온전할 리 없었다. 결국 여공은 해고됐다.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전태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리고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 바로 근로기준법 해설서였다.

제42조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간을 기준으로 한다.

제45조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해야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

제55조
13세 이상 15세 미만자의 근로시간은 1일 1주일 42시간을 초과하지 못한다.


전태일은 진정서를 만들어 노동청을 찾아갔다. 방송국도 찾아갔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전태일은 노동자를 선동하는 위험 인물로 낙인찍혔다. 하루는 노동청에 다녀오는데, 정문 앞에 정장을 입은 웬 남자들이 있었다. 손에 수첩과 펜을 들고 있는 기자들이었다. 전태일은 참상을 보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사가 나가자 노동청에서 곧바로 연락이 왔다.

1주일 내로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평화시장은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시간만 갈 뿐 진전이 없었다. 전태일과 친구들은 더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노동청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노동청 국정감사 기간이라 효과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보가 새어 나가면서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가 시작됐다. 또, 노동청은 압박 및 회유를 시도했다.


수 차례의 좌절 끝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했다. 깔끔한 정장에 깨끗한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서는 전태일을 보고 어머니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시위를 만류했지만 굳게 결심한 전태일이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전태일과 친구들은 휘발유 통, 플래카드 등 시위 물품을 챙겨 3층 비상구에 집합했다. 그러나 계단을 뛰어내려던 중 잠복해 있던 형사들에게 제지당했다.

시위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렸다. 전태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나타난 전태일의 몸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는 품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꺼내 들며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그리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내 친구들아 싸워다오."라고 말한 후 일어나지 못했다.

도대체 노동현실이 얼마나 비참하길래 몸을 불태워서라도 알리고 싶었던 걸까. 세상이 관심을 갖게 시작했다. 특히 대학생들은 많은 충격을 받았다.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전태일의 말에 부끄럽고 미안했던 것이다. 대학가로 항의 시위가 퍼져나갔다. 한편, 노동청 관계자들과 평화시장 업주들이 빨리 장례식을 치르자며 찾아왔다.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번에는 돈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어머니는 남은 3남매를 불러 앉혀놓고 돈을 받을지 말지는 너희들이 결정하라고 말했다. 안락한 삶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가족들은 전태일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회유가 실패하자 노동청장은 노동조합을 허용하고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 후에야 전태일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드디어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이름하야 '청계피복 노동조합'. 전태일의 어머니는 행상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비를 보탰고, 친구들은 끼니도 거르며 일을 했다. 밀린 임근을 회수했고, 야학을 개설해 공부를 가르쳤다. 그리고 일요일에 쉬는 것을 두고 업주들과 끈질긴 협상을 벌였다. 결국 업주들은 휴일을 약속했다. 하지만 업주들은 말만 그리할 뿐 실제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일요일마다 공장을 찾아다니며 감시하고 설득했다. 그래도 안 되면 전기를 내렸다. 친구들은 청계피복 노조가 해산할 때까지 10년간 노동자를 위해 싸웠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는 아들이 사망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사망한 노동자의 빈소에는 늘 이소선 어머니가 있었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온 것이다. 그때마다 "죽지 말고 싸워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내 생에 못 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


전태일이 사망한 지 어느덧 51년이 됐다. 친구들은 전태일이 남긴 부탁을 잊지 않고 지금껏 살아왔다. 노동 현실을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청년이었던 그들이 70대 노인이 되기까지 '나는 전태일의 친구다'라는 마음으로 평생을 견뎌온 것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그 친구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과거에 비해 훨씬 나아진 노동환경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장선우는 "태어났을 때부터 일요일은 쉬는 날이었는데 그동안 감사하다고 생각을 못했었"다고 말했다. <꼬꼬무>는 전태일을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청년'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런 사람이 가진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만약 전태일이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뭐라고 할까. 그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