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봉이 김선달>의 쉬운 선택, 그 고민없는 한계의 아쉬움

너의길을가라 2016. 7. 17.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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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이 김선달>은 여름 성수기를 겨냥한 잘 '빚어진' 기획 영화다. 유쾌한 가족 영화를 요구하는 시장의 부름에 부응하기 위해 그럴듯한 '조각'들을 모아서 꿰매 붙인 꼴이다. 이를테면, 강동원의 작은 얼굴, 이민호의 눈망울, 원빈의 콧날, 현빈의 턱선, 조인성의 분위기, 송중기의 스마트함을 합쳤다고 할까? 그렇게 하면 지상 최고의 '남자'가 만들어질 것 같지만, 그 '합체'의 성과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어색하고 부조화한 것과 같다고 할까?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희대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을 설화(說話) 속에서 끄집어 내 유승호라고 하는 반듯한 청년에게 입히고, 그 옆에 보원(고창석)과 윤보살(라미란)이라고 하는 적절한 조연을 배치시켜 웃음 포인트를 챙기는 동시에 신나는 활극(活劇)을 완성한다. 특히 고창석은 같은 부류의 기획 영화인 <조선명탐정> 시리즈에서 고달수가 했던 역할 그 이상을 거뜬히 해낸다. 


여기에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 된다. 관객들은 무난하고 무탈(無頉)한 기승전결의 물길을 따라서 흘러가게 되는데, '나쁜 놈'을 무찌르는 주인공의 종횡무진 활약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 친절한 이 영화는 말미에 주인공의 '웃는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완벽하게 배려한다. 아, 만족스러워라! 그런데 이 '합체'의 성과는 생각보다 부실하다. 



대동강 물을 팔기 전까지 펼쳐지는 '모험'들은 그다지 신선하지도 흥미롭지도 않고, 나열되는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뻔하다. 이쯤에서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그저 강박에 그칠 뿐이다. 유승호의 '성실함'은 오히려 독이 되는데, 그 전형적인 연기는 '봉이 김선달'이라고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실패한다. 결정적인 패착은 '권선징악'에 대한 과도한 편견이다. 그 치우침은 '고민 없음'이라 부를 만 하다.


애초에 '봉이 김선달'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가치'는 '시대에 대한 조롱과 풍자'였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권세가(權勢家)와 독과점으로 부를 독차지한 상인 등을 골탕 먹이는 데서 오는 전복의 쾌감 말이다. 물론 김선달은 무고한 서민을 대상으로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득권을 희롱함으로써 사람(백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줬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봉이 김선달', 그러니까 김인홍(유승호)은 시대와 호흡하기보다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사기를 친다. 거기까지는 좋다. 굳이 김선달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줄 이유는 없으니까. 차라리 계속 그러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젠 '사적인 복수'가 전면으로 부상한다.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판을 짜고, 그 게임에 '대동강 물 팔기'라는 희대의 사기극이 '소모'된다. 그래서 '전복의 쾌감'은 대동강 물밑으로 수장되고 만다. 


제법 유쾌했던 활극은 권선징악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마냥 앞만 보고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봉이 김선달은 손쉽게 '국가 권력'과 손을 맞잡는다. 아끼는 동생이었던 견이(시우민)를 죽인 성대련(조재현)에 대한 개인적 복수를 하기 위해 국왕(효종)과 결탁한다. 이 쉬운 선택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이로써 선(봉이 김선달+국가)과 악(성대련)의 경계가 그어지고, 관객들은 이 편가름에 쉽사리 판단을 내주게 되기 때문이다.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에 '사금'이 난다며 사기를 치고 거래를 하는 자리에서 술잔의 윗부분을 손으로 더듬는 성대련을 보고 "엄마 젓을 못 먹고 자라면 그렇다던데?"라고 농을 던진다. 그에 대한 성대련의 대답이 참으로 걸작이다. 자신은 4번의 전란(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는데, 임금도 지키기를 포기한 나라를 백성인 그의 부모가 앞장 서 싸웠단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성대련은 그 때문에 엄마 젖을 구경할 수도 없었는 것이다. 


'결핍'을 지닌 그는 '갖고 싶은 것'이 많아졌고, 그 욕망은 지금의 탐욕스러운 성대련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성대련의 고백은 영화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임에도 너무 가볍게 다뤄진 채 넘어간다. 그러니까 성대련을 조금 옹호해보자면, 그는 백성들을 지킬 능력을 상실한 무능한 국가 권력을 과감히 버리고, 전란이라고 하는 지옥과 같은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사적 권력'이다. 물론 그는 조선의 백성들을 청나라에 팔아 넘겨 '화살받이'로 사용하도록 하는 나쁜 권력이다. 하지만 그를 단죄하는 것으로 끝내는 건 너무 쉽다.



"새벽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임금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 <선조실록>25년(1592년) 4월30일 기록 -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보름 만에 선조는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간다. 나라를 지킨 건 오로지 '버려진' 백성이었다. 이때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너졌어야 할 나라였는지도 모른다. 버려도 한참 전에 버렸어야 마땅한 '국가'와 '왕'이었지만, 백성들은 미련하게도 그러하지 못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또 다시 왕은 도망을 선택한다. 남한산성으로 숨어드는 인조를 위해 백성들은 냇가를 건널 수 있게 징검다리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 당겼다. 임금이 겨우 배를 타고 건넜다. 그러자 청나라군에게 인질로 잡혀 갈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吾君 捨我以去乎)'<인조실록>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삼전도의 치욕에 백성들은 통곡했다. 그들은 도대체 '왜' 울었던 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울었던 것일까. 또 다시 국가는 백성을 지키지 못했다.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병자호란 때 끌려간 백성들만 50만 명이라고 한다. 성대련은 청나라에 백성을 팔아 '화살받이'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임금은 자신의 백성들을 청나라에 갇다 바쳤다.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봉이 김선달은 별다른 고민 없이 국가 권력과 손을 잡고, 사적 권력을 처참히 응징하고 만다. 이 싸움 구도에서 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선량한 존재로, 그리고 국가 권력은 정의로 자리매김한다. 거기엔 일고의 반성도 없다. 반면, 제 살 길을 도모했던 사적 권력만 퇴출될 뿐이다. 성대련이 사라진다고 한들 세상이 깨끗해질까? '성대련'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던 건 무능한 국가 권력이었음을 왜 모르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왕조차조 마음껏 조롱했던 '전우치'나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꿈꿨던 '홍길동'과 달리 한낱 얄팍한 '사기꾼'이었던 '봉이 김선달'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한계를 그대로 답습한 영화 <봉이 김선달>의 한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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