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부산행> 속 여성 캐릭터는 어떻게 그려졌나

너의길을가라 2016. 7. 2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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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한국 영화 최초의 '제대로 된' '좀비 영화'로서 분명 수작(秀作)이다. 한발짝 떨어져서 영화의 골격을 훑어보면 1,000만 관객을 겨냥한 수작(酬酌)이 노골적으로 비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한발짝 떨어지는 게 쉽지 않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고 강렬하다. 여간 만들기가 쉽지 않은 '좀비물'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게', 아니 그럴 틈조차 없게 만들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기립박수를 보내도 모자란다.



'잔가지는 쳐낸다'


<부산행>의 목적은 뚜렷하다. '좀비(감염)'가 발생하게 된 원인?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결과? <부산행>은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열차'라는 직선상의 좁은 공간에 집중하고,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지금 이 순간의 사투(死鬪)에만 몰두한다. 집요하리만치 몰입한다. 


관객들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좀비'의 출현, 그것도 떼로 달려드는 이 끔찍한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건 무력감이다. 그래서 상화(마동석)의 등장은 묘한 안도감을 준다. 원인, 해법, 결과와 같은 곁길을 돌아보지 않는 영리한 선택 덕분에 <부산행>은 관객들을 '혼돈' 속으로 밀어넣어, 더욱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어떤 방어도 할 수 없이 순식간에 좀비에 감염돼 버리는 사람들처럼 관객들은 어느새 <부산행>에 감염된다.



분명 잘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영화 곳곳에서 아쉬운 대목들이 눈에 띤다. 우선, '전형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측을 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좀비와는 달리 이야기의 흐름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예측 가능하게 흘러간다. 그건 영화 속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재난 영화'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재난'인 것처럼, <부산행>의 진짜 주인공은 끊임없이 각기춤을 추는 '좀비'처럼 보인다. 


극단적인 악마성을 드러내는 용석(김의성)과 '마동석'이라는 '마성의 매력'을 고스란히 옮겨온 상화는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 아무리 살고자 하는 욕망, 그 처절한 이기주의가 인간 본연의 것이라지만, 용석의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도드라진다. 또, 좀비마저도 손쉽게 제압하는 상화의 압도적인 힘은 어이상실 수준이다. "마동석 10명이면 좀비들 다 때려잡겠는데?"라는 실소가 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농담'을 하는 여유라니!



<부산행> 속 여성 캐릭터를 살펴보자.


영화 후반부에 석우(공유)가 보여주는 고해성사는 제법 눈물샘을 자극한다. 신파라고 하더라도 '재난 영화'의 특성상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사실 이런 부분들은 이미 '지적'돼 왔던 내용들이기도 하고, <부산행>의 '좀비물'로서의 가치에 비하면 눈감아도 무방할 단점이다. 그보다 우리가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아쉬움은 <부산행> 속에서 '여성 (캐릭터)'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부산행>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여성은 석우의 딸 수안(김수안)과 상화의 아내 성경(정유미), 고교 야구선수 영국(최우식)을 좋아하는 진희(소희) 정도일 것이다. 물론 정체를 알 수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자매 종길(박명신)과 인길(예수정)도 있다. (심지어 분장마저 어색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좀비'와 싸우는 데 <부산행> 속의 여성들은 '방해'가 될 뿐이다.



수안은 여자 어린이(아들이었던 설정이 딸로 바뀌었다고 한다)다.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임신을 해 배가 잔뜩 부른 성경은 어떤가? 당연히 보호의 대상이다. 그는 연신 '상화'를 찾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 새끼야!"라며 소리치곤 넓디넓은 '마요미'의 가슴을 쥐어박는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기 바쁜 진희도 영국에게 기댈 뿐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부산행> 속의 여성들은 '누군가의 OO'으로 존재한다.


등신같이 착하게 만 살아온 언니 인길이 좀비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 좀비들이 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열차 문을 활짝 열어버린 종길은 공교롭게도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응징'하는 롤을 수행한다. 하지만 특별한 의지를 갖고 한 행동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민폐'라고 볼 수도 있는 행동이다. 기껏 살겠다고 용쓰는 사람들까지 죽여버릴 건 뭐람?



<부산행>에서 끝내 살아남는 것은 '여성'이다. 여기에서 감독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지키다 희생된다. (물론 혼자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못난 남성들도 있다) 어린이와 임산부,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연상호 감독이 그려낸 '기사도 정신'은 사회의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건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어째서 <부산행>에는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싸움'이 펼쳐지지 않는가. 어째서 모든 의사결정은 '남성'들이 도맡아 하고, '여성'들은 그에 순응하거나 거부하는 존재로만 그려질까? 어째서 장렬히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여성은 보이지 않는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그 지옥 같은 싸움 속에서 거침없이 활약하는 모습을 <부산행>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면 금상첨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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