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도희야>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

너의길을가라 2014. 5. 2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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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지역적인 이야기인데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놀랐어요. 사실은 공감할 수 있을지 걱정됐거든요. 아직도 믿기지 않네요. 하하."


- 정주리 감독 - 



제67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은 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의 <화이트 가드(White God)>에게 돌아갔다. 심사위원상은 루벤 외스트룬트 감독의 <관광객>이 차지했다. 이 부문에 초청 받았던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는 아쉽게 수상에 실패했지만, 무엇보다 '초청' 그 자체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박수받을 만하다. 


지난 5월 22일 개봉한 <도희야>는 25일까지 72,394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7위에 올라있다. 개봉 첫날 5위로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순위는 다소 하락했지만, 관객 수는 첫날에 비해 늘어났다. 관객 추이를 살펴보자면, 13,512명(22일) → 14,870명(23일) → 21,412명(24일) → 19,586명(25일)이다. 25일에는 전날에 비해 관객 수가 다소 줄었지만, 이는 <도희야>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당일 영화 관객 수가 줄어든 것이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누군가가 '<도희야>는 어떤 영화인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불편한 영화'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렇게 표현하면 조금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도희야>는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담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외면하고 싶은 사회적 문제들, 켜켜이 쌓여 있는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들을 피하지 않고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그 문제의식들이 소중하기에, (거기에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더해져서) '불편한 영화지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도희야>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된 줄기는 의붓아버지 용하(송새벽)와 할머니로부터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14세 소녀 도희(김새론)가 뿅하고 등장한 '(영웅이자) 구원자' 영남(배두나)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극 중에서 동성애적 코드가 등장하고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지지만, 이는 부착적인 장치일 뿐, 정주리 감독의 말처럼 <도희야>는 '외로움의 차이에서 만난 두 여인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자신의 성적 취향(동성애)으로 벌어진 논란 때문에 여수의 한 파출소로 좌천된 영남이 겪게 되는 성 소수자에 대한 인권 유린이 곁들여지고, 일손이 현저히 부족한 어촌 마을에 끌려와 제대로 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가혹한 노동과 폭력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언급된다. 그 장면은 올해 초 전국민적인 분노를 자아냈던 전남 신안의 '염전 노예' 사건을 떠올리게끔 한다. 



소위 '막장 드라마'가 '막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는 이유는 개연성이 결여된 스토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를 앞세워 쉽게 쓰여졌다는 의미다. 막장 드라마는 완벽하게 선과 악을 구분해서 제시한다. 시청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착하기만한 주인공을 대놓고 응원하면 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마냥 악하기만한 적들을 향해 욕을 쏟아부으면 된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 세상인가?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구분법이 가능할 리 없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더라도 그러하지 않은가? 실제 우리의 사고와 행위에는 선악이 혼재되어 있고, 사실상 선악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으로 여겨질 때가 더 많다. <도희야>가 이야기에 힘이 실리는 까닭은 바로 '도희'가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황진미가 정확히 표현한 것처럼, '도희는 가련한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한편 '할머니의 말처럼 "요사스러운" 구석이 있고, 용하의 말처럼 "똘끼가 있으며", 의경의 말처럼 "어린 괴물 같은"면이 있는 소녀'이다. 천진난만한 모습 속에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자신만의 영악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간 동안 폭력과 학대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의 특성이라고 한다. 만약 영화가 '도희'를 단순히 가련하고 약한, 선하기만한 존재로 그려냈다면 이야기는 힘을 잃고 표류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이라고 믿고 싶어하고, 거듭된 합리화를 통해 이를 꾸며대지만, 실제로는 '이해관계'에 의해 나 자신에게 철저히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지키거나 획득하기 위해 그로 인해 손해를 봐야 하는 누군가를 착취하곤 한다. 게다가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촘촘한 관계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불합리를 수긍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남이가'


<도희야>는 그러한 소수자들이 만들어낸 카르텔을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는 약점을 빌미삼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서서 그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남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자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영남이 조용한 마을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비난한다. 


마을의 이익을 위해 형성된 카르텔은 이처럼 불법에 철저히 무감각하다. 물론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중장년만 남게 된 어촌 마을은 일손이 필요하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마을 사람들 역시 사회적으로 볼 때 소수자에 속하지만, 이들이 찾아낸 해법은 결국 또 다른 (그들보다 더 약한) 소수자를 착취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술이 죄'라고 말하며 용하의 아동 학대를 묵인하는 마을의 경찰관은 어떠한가? 폭력을 '가정 교육'쯤으로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는 마을 주민들은 어떠한가? 이들에게 있어 '용하'는 마을의 유일한 젊은이이자 기둥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하의 무도한 행위에 침묵한다. 



<도희야>는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거듭 거듭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도희야>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산재(散在)해 있지만, 애써 외면하고 기피하려고 했던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직시(直視)하고 이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면 무난한 영화 감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넘어, 사실 그러한 문제들에 있어 나 자신도 비껴 있지 않았음을, 어쩌면 나 또한 방관하거나 묵인함으로써 또는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이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도희야>를 '제대로' 감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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