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집으로 가는 길, 개인의 고군분투!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다

너의길을가라 2013. 12. 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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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없이 <집으로 가는 길>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욕(辱)' 없이 <집으로 가는 길>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2004년 10월 30일, 평범한 한국인 주부가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서 마약 운반범으로 오인(원석을 운반한다고 속은 채)되어 체포된다. 그녀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카리브 해의 외딴 섬 마르티니크 감옥에 이감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당시 기사를 통해 실제 주인공의 사연을 접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로 프랑스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끊이지 않았다" (방은진 감독)


'놀랍게도'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에 더욱 '욕'이 나온다. 분통이 터지고, 화딱지가 난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란 무엇인가? 정부(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12,400km, 756일 간의 기록.

'개인'의 고군분투, '국가'는 없었다.


"실제 인물들의 심경과 배경들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어떻게 접목시켜서 표현해낼 것인지가 사건을 영화화함에 있어 가장 큰 과제였다" (전도연)


정연(전도연 분)은 자신의 가방에 든 것이 코카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주불 한국대사관은 정연을 위해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그저 부끄러워 할 뿐이다. 나라에 먹칠을 했다며 눈살을 찌푸린다. 결국 정연은 재판조차 받지 못한 채,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카리브 해 어딘가에 있는 마르티니크 섬의 감옥으로 이감된다. 


'대한민국'의 검찰을 비롯한 행정당국은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정연과 종배(고수 분)의 호소를 외면한다. 주불대사관은 자국민인 정연을 위해 최소한의 역할로 일관한다. 프랑스어를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정연을 위해 통역을 붙여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나중에 논란이 됐을 경우, 면피용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만큼만 기능한다. 가령, 한 번 찾아가서 얼굴을 확인하고 생필품을 건네주는 것 정도 말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영문도 모른 채 긴 세월을 대서양 외딴 섬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던 한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로우면서도 가슴 아팠다. 특히 실제 사건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송정연'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전도연)


반면, 종배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다. 딱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종배의 모습에서 측은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사실 그보다 훨선 더 우선하는 것은 '답답함'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현실인가?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더라도 국가는 이런 정도의 대처를 보여주진 않을까? 


국민을 위해 '호들갑'을 떨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가장 기본적인 조치들을 취해주는 것, 정연의 말처럼 '관심 좀 가져달라'는 것이다. 전도연의 말처럼 <집으로 가는 길>은 2004년에 평범한 한 주부가 겪었던 기상천외한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현실'은 아닐까?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 마약범죄에 연루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연의 사건을 담당하는 마르티니크의 판사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정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나라의 대사관이 나쁜 겁니다" 우리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P.S. (1) 깨알같이 등장하는 아고라! 그리고 누리꾼의 힘?

P.S. (2)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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