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여행기

"폭설로 나고야행 버스는 운휴" 변수와 우연이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너의길을가라 2025. 2. 10. 07:30
반응형

지난 7일, 강풍을 동반한 폭설이 제주도를 강타했다. 순간최대풍속 초속 31m의 눈보라가 몰아치니 비행기가 제대로 뜰 리가 없었다. 제주국제공항 항공편이 무더기 결항해서 2만 명이 넘는 이용객의 발이 묶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당혹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올해 초 일본 시라카와고(白川郷)에서 난감했던 일이 떠올랐다.

'눈의 마을'이라고 불릴 만큼 강설량이 많은 곳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침에 창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1층 창문의 절반 가까이 눈이 쌓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료칸의 직원도 예외적인 날이라며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 놀라움도 잠시, 이제 여행의 베이스캠프인 나고야(名古屋)로 돌아가야 했다.  

아침 일찍 버스터미널로 가는 셔틀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길은 설국 그 자체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언제 또 이런 풍경을 보겠냐며 감탄했다. 터미널에는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일본어에 능숙하지 않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 건 감지할 수 있었다. 터미널 직원이 의문의 A4용지를 들고 승강장에 나타났다.

나고야행 버스가 서야 할 1번 승장장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자고로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 법, '운휴(運休)'였다. '오늘 나고야로 가는 버스는 운행하지 않습니다.' 직원은 본인이 더 안타깝다는 말투와 태도로 설명을 이어갔다.

다행히 대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다카야마(高山)'로 간 다음 거기에서 다시 나고야로 가는 교통편을 찾아봐야 했다. 오전 중에 나고야에 도착한다는 원래의 계획이 어그러지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MBTI식으로 말하자면, '파워 J'의 약점이자 한계이다. 눈이 더 이상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반응형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p. 18)

위기에 강한 아내는 "어차피 다카야마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죽상을 하고 있으면 뭐해?"라며 나를 펑펑 내리고 있는 눈 속으로 이끌었다.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걱정은 잠시 잊고 눈싸움을 하고, 눈길을 거닐며 인생 사진도 남겼다.

다행히 다카야마로 가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했다. 다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다카야마에서 나고야로 가는 버스 노선이 살아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다카야마에서 나고야는 여전히 150km나 떨어져 있었다. 시라카와고에서 나고야까지의 거리와 다를 게 없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일본 버스 예약 사이트(highwaybus.com)에 접속해 예약부터 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잠시 후 버스 예약이 취소됐다. 다카야마에서 나고야로 가는 버스도 운휴였다. 혹시나 몰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후 직원에게 문의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동일했다.

물론 파워 J는 어떤 상황에서 플랜B를 세워두는 법! 우리는 버스터미널 바로 옆에 위치한 다카야마 JR역으로 향했다. 다행히 열차는 운행을 하고 있었고, 나고야행 JR을 예약했다. "휴, 이제 됐다." 귀환이 가능하졌다. 잔뜩 움츠렸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는 순간이었다.

다카야마 JR역

열차 시간까지는 1시간이 조금 넘게 남아 있었다. 여유가 좀 생긴 걸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달리하면, 계획대로 됐다면 오지 않았을 곳에 운명적으로 당도한 것 아닌가.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는 다카야마를 조금이라도 둘러보고 싶어졌다.

다카야마는 시라카와고와 묶어서 투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큰 도시가 아니다보니 그 정도로 스쳐지나가는 여행지다. 구글맵을 켜보니 '산마치 전통거리보존지구'까지 도보로 15분이면 충분했다. 시라카와고에서 장만했던 장화를 신고 있던 터라 다카야미 시내의 진창길도 문제 없었다.

산마치 전통거리보존지구

단정하고 깔끔한 거리는 한산했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눈에 띠었다. 시간이 조금만 넉넉했더라면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을 정도였다. 미야카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보이는 경광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물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산마치 전통거리보존지구는 우리가 흔히 일본스럽다고 할 거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풍경이 고즈넉했다. 가볍게 둘러본 후 기념품으로 젓가락 세트를 구입하고 열차 시간에 맞춰 역으로 이동했다. 돌아오는 미리 봐뒀던 빵집에서 주전부리도 사왔다.

산마치 전통거리보존지구

나고야로 가는 길은 충만했다. 물론 간식거리도 풍족했지만, 무엇보가 마음이 가득 찼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일정, 변수와 우연들이 속출했던 여행이었지만, 소설가 김영하의 말처럼, 여행기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갑작스레 생긴 빈칸들이 살뜰히 채워지는 경험은 나를 확장시키는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

얼마나 지났을까. 설경으로 가득했던 창밖의 풍경에는 어느새 눈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돌이켜보니 정말 꿈과 같았던 여행이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시라카와고에서 나고야로 돌아오는 길, 예측불허한 일로 가득했던 그 날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