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여행기

겨울에 일본 여행을 간다면 '시라카와고'에 가야하는 이유

너의길을가라 2025. 1. 26. 07:00
반응형

"내일은 시라카와고(白川郷)로 갑니다."


일본 나고야에서 이틀째 되던 날, 재일교포 3세 사장님이 운영하는 이자카야에서 야키토리(닭꼬치)를 먹었다. 원래 가려고 계획했던 식당은 덴뿌라(튀김)집이었는데, 마침 그곳이 문을 닫은 듯했다. "구글맵에는 분명 '영업중'으로 나와있는데.." 건물 앞 노상에서 당황하고 있는 우리를 본 걸까. 인근 식당에서 한 여성 분이 나오더니 서투른 한국말로 말을 건넸다.

그는 튀김집이 새해 연휴 기간이라 문을 닫았다며 자신이 다른 튀김집을 찾아봐주겠다고 제안했다. 계속 "덴뿌라"를 반복하는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날씨가 추우니 일단 안쪽으로 들어오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알고보니 그 여성은 손님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의 이자카야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플랜B가 없던 터라 그냥 그곳에 눌러 앉기로 했다.

MBTI로 말하자면 '파워J'인 나는 철저한 계획 하에 움직이는 걸 선호하지만, 최근에는 여행에서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과의 조우를 즐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행 속의 실패에서 풍성한 이야기가 나오고, 변수를 통해 다양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불쑥 찾아오는 실패와 변수들에 철렁하지만, 그 컨트롤할 수 없는 순간들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장님은 야키토리 재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오리혀 미안해 했는데, 애당초 야식으로 간단히 분위기만 낼 생각이라 있는 것만 조금 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인인 내가 궁금했는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인 손님이 말을 걸어왔고, 서투른 일본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내일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일 시라카와고에 간다고 하니 첫 반응이 "유키(눈)"였다. 열렬한 호응이 이어졌다.

나고야에서 시라카와고로 가는 버스

그렇다. 눈의 마을! 기후현(岐阜県)에 위치한 시라카와고는 별칭답게 눈 쌓인 풍경으로 유명하다. 연강설량 평균이 무려 972cm에 달하는데, 큰 눈을 버티기 위해 갓쇼즈쿠리(合掌造り)라는 독특한 지붕 양식이 발달했다. 갓쇼즈쿠리는 억새로 된 지붕으로 경사가 심한 맞배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경사가 심한 까닭은 그래야 눈이 지붕 위에 쌓이지 않고 미끄러져 내리기 때문이다.

갓쇼는 일본어로 '합장(合掌)'을 뜻하는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양을 떠올리면 이해가 좀더 쉽다. 시라카와고 갓쇼즈쿠리 마을은 산악 지대에 위치한 데다 적설량이 많아 오랜 세월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던 터라 일본 전통 가욱과 생활 방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이유로 1995년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우리나라로 치면 안동 하회마을쯤 될까.  

사실 나고야로 떠난 건 시라카와고에 가기 위함이었다. 추위가 싫어서 잠시라도 한파를 피하고자 따뜻한 두바이로 여행을 가려 했으나, 계획이 틀어져 다른 여행지를 물색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차라리 '이한치한(以寒治寒)'을 모색했다. 이참에 눈을 실컷 보고 오자고 생각했다. 물론 시라카와고에서 보낸 이틀 동안 평생 살면서 볼 눈이란 눈을 다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일본 버스 예약을 할 수 있는 highwaybus

이자카야 사장님과 손님들의 응원에 힘입어 다음 날 아침 일찍 나고야 메이테츠 버스 센터(名鉄バスセンター)로 향했다. 버스 티켓은 현장에서도 발권할 수 있지만, 인터넷 사이트(https://www.highwaybus.com)에서 미리 예약을 해두는 편이 안전하다. 사이트에서 자체 지원하는 한국어 번역을 사용하거나 한자로 된 지명만 알면 예약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나고야에서 시라카와고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총 6편(07:50, 08:20, 08:50, 09:20, 09:50, 15:00)밖에 없는데, 워낙 인기 있는 노선이라 자칫 원하는 시간에 갈 수 없거나 매진되는 경우도 많다. 버스로 2시간 40분 가량 소요되는 긴 여정이라 편의점에서 주전부리를 좀 사서 대비를 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들리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휘황찬란한 휴게소가 아니다.

반응형

시라카와고 인근 마을

시라카와고에 가까워지자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은 온통 흰색으로 채워졌다. 눈이 끝도 없이 내렸다. "이렇게까지 온다고?" 감탄은 곧 걱정과 우려로 변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현재, 눈발이 휘날리는 시라카와고는 내 머릿속에 형성된 시라카와고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랐다. 도대체 무슨 얘기냐고?

SNS 등에 '시라카와고'를 검색해보시길! 눈덮인 마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여기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결심이 샘솟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풍경들은 모두 눈이 그친 후의 어느 시점이었다. 그러다보니 눈이 내리고 있는 시라카와고가 낯설 수밖에! 아마도 일기예보를 좀더 세심히 파악할 수 있었다면 이 시기를 피했을까. 그래서 버스 좌석이 절반 가량 비어 있었던 걸까.

시라카와고의 모습

시라카와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도무지 걸어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가방을 근처 보관소에 맡기고 마을을 향해 몇 걸음 옮겨봤지만 눈길은 녹록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성을 발휘해도 신발과 양말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짜증이 솟구쳤다. 문득 '장화(長靴)를 사자!'는 생각이 들었다. 상점 몇 곳을 거친 후에야 겨우 두터운 양말과 장화를 구입할 수 있었다.

장화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더 이상 신발이 젖을까봐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었고, 발가락에 전해지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무엇보다 시선이 해방됐다. 다음 스텝을 놓기에 적합한 공간을 찾기 위해 땅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제서야 시라카와고의 설경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와..!" 새삼 아름답다고 느꼈다. 온전히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시라카와고의 모습

이처럼 시라카와고 여행은 장화를 구입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전까지만 해도 징글징글했던 눈이, 괴롭기만 했던 그 시간이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다. 과감히 눈을 밟으며 뽀드득하는 소리와 감촉을 경험하고, 괜시리 눈을 뭉쳐 던져보기도 했다. 눈이 얹져진 갓쇼즈쿠리를 배경 삼아 사진도 찍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눈의 마을을 방문한 여행객이 되어보았다.

시라카와고에 오길 잘했다. 나고야의 이자카야 사장님과 손님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며 왜 그리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그 감동은 변수들이 자아내고 증폭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옆에서 함께 눈을 바라보고 있던 아내에게 말했다. "고생은 금세 잊혀지고, 이 아름다운 풍경과 행복했던 추억은 오래 기억될 거야. 고마워! 시라카와고에 함께 와줘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