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여행에서 '랜드마크'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다. 여행 책자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법한 유명한 관광지도 좋지만, 그보다는 세심하게 정보를 찾아봐야 알 수 있는 랜드마크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곳이 있었어?' 그럴 때마다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았을 때 느끼는 희열을 얻는다. 아마도 여행지를 선정할 때 대도시에서 소도시로 시선이 옮겨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올해 초 나고야(名古屋)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나고야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시라카와고(白川郷)에 위치한 일본 전통 마을 갓쇼즈쿠리(合掌造り)에 가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기후시(岐阜市)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강력한 결심을 불러일으킨 동기는 '모두의 숲(みんなの森, Minna no Mori) 미디어 코스모스'라는 공공 도서관이다.
뉴욕에 여행을 갔을 때도 부럽다고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뉴욕 공립도서관'이었다. 공공건물의 위엄을 높이는 보자르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 안에서 여유롭게 책을 탐독하는 뉴욕 시민들, 그 당연함에서 발현되는 일상성에 질투를 느낄 지경이었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나오면 '브라이언트 파크'라는 오아시스가 펼쳐지니 저들의 행복감과 만족감은 내 입장에서는 측정 불가였다.
일본 기후시에도 나를 질투에 불타게 할 도서관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구글맵을 통해 나고야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 거리라는 사실을 파악하고서 곧바로 여행 일정에 포함시켰다. 어쩌면 이미 상상 속에서 나는 '모두의 숲'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뉴욕 공립도서관'은 뉴욕 시민이 아니면 이용이 불가(1층 리딩룸은 이용 가능)하지만, '모두의 숲'은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이쯤되면 '모두의 숲'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지 궁금할 것이다. 책을 소개하려면 작가를 소개해야 하듯이, 건축물을 이해하려면 건축가를 알아야 한다. 기후시립도서관 '모두의 숲'은 2013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 이토 도요(伊東豊雄)가 설계했다. 프리츠커상이라고 하면 생소해서 감이 안 올 수 있는데,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런 대단한 상을 받은 건축가가 지었으니, '모두의 숲'이 평범한 도서관은 아닐 거라 예측할 수 있다. 먼저, 사진으로 '모두의 숲'을 만날 것을 권한다. 수많은 말보다 하나의 시각적 정보가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의 숲'을 설명할 때도 그러하리라. 나 역시 '모두의 숲'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고, 저 안에서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6일, 나고야에서 메이테쓰 특급 열차를 타고 기후시로 달려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도서관 가기 좋은 날씨가 아닌가. 주변 상가를 구경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기후 시청' 인근에 다다랐다. 눈앞에 '모두의 숲'이 있었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오래된 격언을 따르기로 했다. 근처 식당에서 소바를 먹고 드디어 목적지로 향했다.
"혼자서는 그렇군 그렇군. 너와는 두근두근. 모두와는 왁자지껄." ('모두의 숲'의 캐치프레이즈)
내부로 들어가자 열린 공간이 주는 개방감이 확 전해졌다. 전체적으로 나무를 활용한 인테리어라서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1층은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평생교육시설이나 세미나 장소, 다문화 주민을 위한 창구로 쓰이고 있다. 시야가 확 트인 창으로는 기후 시청이 보이는데, 그곳에 비치된 의자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근사한 분위기의 '스타벅스'도 있다.
1층을 둘려보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온통 2층에 쏠려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마자 펼쳐지는 광경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바로 '모두의 숲'의 상징인 '글로브'라는 독특한 구조체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나무로 곱게 짜인 천장은 마치 곡선으로 물결치고, 거기에 깔대기 모양의 글로브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마치 우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아, 여기 도서관이지.'라며 입을 막으려 했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목소리 들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의 숲'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침묵의 도서관이 아니라 시민들이 '왁자지껄' 즐기는 도서관이었다. 실제로 시민 모두가 모여서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즐거운 만남을 갖고, 마음의 휴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시설의 목적이라고 한다.
이토 도요는 그런 지향점을 갖고 오랜 시간 기후 시민들과 소통하며 '모두의 숲'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900석이 넘는 좌석에는 기후 시민들이 이미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중년, 학생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시험 기간인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유독 많았다. 동화책 등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제법 눈에 띠었다.
천장이 30cm만 높아져도 창의성이 쑥쑥 자란다는데, 이렇게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구조체로 가득한 공공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그들이 어김없이 부러웠다. 또, 한편으로 대한민국 학생들의 열악한 처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공간을 아이들에게 마련해주지 못하는 걸까. 규격화된 삭막한 건물 안에 몰아넣은 채 창의력을 키우라고 하는 건 잔인한 일 아닌가.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그들의 일원인양 능청스럽게 글로브 아래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쳐들었다. 왠지 책이 술술 더 잘 읽히는 듯했다. 자연광을 사용한 실내 조명은 은은하면서도 눈에 피로를 주지 않았고, 가운데 개폐가 가능한 창은 자연 바람의 흐름을 만들어 자동으로 환기가 됐다. 참고로 글로브는 기후에서 자란 히노끼(노송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2015년 7월 개관한 '모두의 숲'은 기후 시민 모두가 사랑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지역과 사람이 이어진 공간, '모두의 숲'은 로컬 도서관의 가치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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