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미시마 유키오와 레미제라블

너의길을가라 2013. 10. 26.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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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는 그가 《씨네21》에 연재한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씨네21》을 거의 매주 챙겨보긴 하지만, 진중권의 글을 꼬박꼬박 챙겨보진 않았기 때문에 낯선 글들을 꽤나 많았다. 구독해서 읽으셨던 분들은 굳이 다시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잡지로 읽는 것과 단행본으로 읽는 것은 느낌적인 차이가 있으니 새로운 기분으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진 등의 자료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구성되긴 했으니까. 


진중권의 글을 좋아하긴 하지만, 미학 관련 글에는 딱히 취미가 없다. 그래서 많은 것을 건지진 못했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죽음 앞의 인간 -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과 유미주의'와 '우리가 잃어버린 것: 민주주의적 에토스와 사랑'이라는 챕터였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는 그가 《씨네21》에 연재한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씨네21》을 거의 매주 챙겨보긴 하지만, 진중권의 글을 꼬박꼬박 챙겨보진 않았기 때문에 낯선 글들을 꽤나 많았다. 구독해서 읽으셨던 분들은 굳이 다시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잡지로 읽는 것과 단행본으로 읽는 것은 느낌적인 차이가 있으니 새로운 기분으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진 등의 자료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구성되긴 했으니까.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무엇보다 평화헌법 반대와 천왕제를 부활을 주장하며 할복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에 대한 진중권식 해석이 흥미로웠다. 많은 사람들이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풀이한다. <한겨레>의 허미경 기자의 말처럼,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이전의 글들은 "일본 문학자들이 미시마의 탐미주의를 탐구하다가 그 탐미 안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고, 그 대척점에 선 글들은 그의 극우적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준엄한' 사상 비판에만 머"무르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진중권은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을 '일본 특유의 유미주의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미시마에게는 '죽음을 향한 자신의 성적 충동을 포장할 어떤 가치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우국'과 같은 대의명분이었다는 것이다. '낭만적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운문적 죽음을 연출해야 한다는 게 미시마의 가장 큰 실존적 문제'였다. 문제는 미시마 유키오가 살았던 일본사회는 '대의를 위한 의미 있는 죽음이 이미 사라진 시대'였다는 것이다. 미시마의 선동에 일본 사람들이 비웃음과 모욕으로 반응했던 것은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미시마는 그것을 몰랐을까?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기막힌 연출을 통해 역전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작가이자 영화 감독이었던 미시마는 자신이 출연하거나 감독을 맡았던 영화에서 이미 몇 차례 할복 장면을 연출한 경험이 있었다. 일종의 실험이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연출에 심취한 나머지 그것을 현실로 연장시키는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보디빌딩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할복을 준비했던 것도 그의 영화적 연출 감각일까? 어찌됐든 그는 '할복'이라고 하는 형식과 '우국'이라는 대의명분에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충동을 발산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현실의 비루한 자아는 거울(=영화)에 비친 완벽한 자아, 자아의 이상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진중권은 무덤덤하게 한마디를 보탠다. 그것은 '그다지 영웅적이지 못하다'고 말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우리가 잃어버린 것 : 민주주의적 에토스와 사랑'은 대선 직후에 쓰여진 글인데, <레미제라블>의 엔딩곡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기사로 시작된다. 대선을 복기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것은 우리 바깥의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에토스인지도 모른다. 그 추위에 지팡이를 짚고 투표장에 나서는 노인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우리와 다르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그 열정만큼은 우리의 것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비천한 자들(les miserables)'이다. 왜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협력자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진중권의 자성과 지적은 참으로 뻐아프다. 대선 이후, 세대간 갈등이 심화되었던 것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도 그 골이 메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바리케이드 저 너머에도 연대해야 할 민중이 있다. 그저 바리케이드 저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들을 너무도 쉽게 적으로 돌려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진중권의 진중한 고백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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