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여행 가는데 꼭 챙겨야 할 게 뭐야?"
만약 누군가 뉴욕 여행에 대한 조언, 그러니까 꼭 챙겨 가야 하는 필수 아이템에 대해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안다. 바로 '돗자리(mat)'다. 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재고의 여지는 없다.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반드시 돗자리가 아니더라도 '식탁보'를 비롯해서 널찍하게 펼쳐서 깔고 앉거나 누울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가능하다.
뉴욕 여행을 가는 데 왜 돗자리가 필요하냐고? 왜냐하면 '공원' 때문이다. 격자형으로 쭉 뻗은 뉴욕 도심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공원을 만날 수 있다. 저 유명한 센트럴 파크를 비롯해 낭만 가득한 브라이언트 공원, 분수가 매력적인 워싱턴 스퀘어 파크, 그린 마켓이 들어서는 유니언 스퀘어 파크, 플랫 아이언 빌딩이 보이는 매디슨 스퀘어 파크 등 각 공원마다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뉴욕의 공원은, 그곳이 어디든 간에 똑같은 풍경이다. 푸릇한 녹지 위에 '자유'와 '여유'가 펼쳐져 있다. 돗자리나 식탁보, 요가 매트 등을 펴고 자리를 잡은 뉴요커들이 챙겨온 음식과 음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나란히 누운 커플들이 담소를 나누며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 원반 던지기나 럭비공 놀이를 하는 청년들도 있고,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여성들도 있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상의를 탈의한 근육질의 뉴요커들이 일광욕을 즐긴다. 여기가 도심 안의 공원인지 해수욕장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가장 놀랐던 건 공원 속 뉴요커들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가 불룩 나온 아저씨도 과감히 상의를 벗어버려도 되고, 수영복만 입고 공원을 활보해도 되는 곳이 바로 뉴욕의 공원이다. '완벽한 자유'라고 부를 만했다.
여행 5일째,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렀다가 센트럴 파크를 가로지르게 됐는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원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들이 발산하는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싶었다. 자유로움 속에 녹아들고, 한가로움 속에 잠겨 있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떻게 뉴욕의 공원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우리도 자리를 잡고 누워버리자!'
"지금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센트럴 파크 크기의 정신 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다." (프레더릭 옴스테드, 조경 건축가)
센트럴 파크에 가면 그 압도적인 크기에 놀라게 되고, 도시와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정신없고 혼잡스러운 도심에서 벗어나 온전히 센트럴 파크라 불리는 세계에 들어간 기분이라고 할까. 하염없이 공원을 거닐다보면 몇 가지 질문이 든다. 도대체 왜 이렇게 큰 공원을 지은 걸까. 어째서 도시와 공원을 분리시켜 놓은 걸까. 이 공간은 뉴요커에게 어떤 의미일까.
센트럴 파크는 백년지계의 대표적인 예이다. 1820년대 뉴욕의 인구는 12만 명에 불과했지만, 1850년대에 들어 51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기존의 중심지였던 로어 맨해튼을 벗어나 미드타운 맨해튼으로 확장해 나가던 시기이다. 1857년 뉴욕시는 대규모 공원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센트럴 파크 조성 계획을 세웠다. 이때 수석 건축가로 임명된 사람이 조경 건축가 프레더릭 옴스테드이다.
이용민은 자신의 책 <뉴욕, 기억의 도시>에서 프레더릭 옴스테드는 센트럴 파크를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단시간에 진입하는 공간(p. 120-121)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썼다. 프리더릭 옴스테드는 길이 약 4,000m, 너비 약 800미터의 직사각형 공원에 약 55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대규모 녹지를 조성했고, 동물원, 호수, 초원, 스케이트장 등 다양한 휴식 공간을 마련했다.
흥미로운 점은 센트럴 파크의 입구와 출구가 도시 체계와 연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뉴욕 시내에서 센트럴 파크로 진입하려면 입구를 찾아 제법 걸어야 한다. 왜 이렇게 접근성이 떨어지냐고 투덜거리기도 했는데, 센트럴 파크에 들어가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도시와 자연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히 분리되는 개념(p.121)"을 구현하려 했던 프레더릭 옴스테드의 의도였다.
센트럴 파크는 말 그대로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심의 일상에서 피로를 느낀 뉴요커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이다. 자유와 여유를 만끽하는 뉴요커들로 가득한 십 메도우를 비롯해서 보트를 타는 연인들로 북적이는 호수, 버스킹 공연이 열리는 베데스다 테라스,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보우 브리지, 존 레논을 기리는 스트로베리 필드 등 다양한 명소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돗자리를 챙겨갔냐고?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여행 짐을 챙길 때는 그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잔디밭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뉴요커들에게 엄청난 질투심(?)을 느낀 후에야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돗자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서울 여의도(2.9㎢)보다 넓은 센트럴 파크(3.4㎢)에 내 몸 하나 누일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날로부터 미드타운 맨해튼에 있는 마트란 마트는 모두 뒤지고 다녔다. 월마트, whole foods market, target, 무신사, 백화점 등을 돌아다녔지만, 우리가 찾는 돗자리는 없었다. 심지어 뉴욕에 딱 하나 있는 '다이소'까지 찾아갔지만 '불발견'이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센트럴 파크에 누워서 유유자적하는 내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만둘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생각까지 했냐면 미국 주방용품점 'Williams-Sonoma'에서 20만 원 상당의 식탁보를 구입할 작정까지 했다. 그만큼 센트럴 파크에 진심이었다. 아내와 상의 끝에 마지막으로 들러본 마트가 'jacks'였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아내와 찢어져서 마트 내부를 살피던 중, 기쁨에 겨운 아내의 환호성이 들렸다. 손에는 우리가 그토록 찾던 피크닉 돗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15.23 달러짜리 가성비 좋은 돗자리를 들고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가는 길에 과자와 음료도 사고, 호텔에 들러 미리 챙겨갔던 책도 지참했다. 센트럴 파크 입구에서 십 미도우까지는 15분 가량 더 걸어가야 했지만,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공원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은 비로소 질투심 대신 동질감으로 채워졌다.
'이제야 나도 진정한 뉴요커가 되는구나.'
적당히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폈다. 여전히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유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자리를 고쳐 앉고 책을 펼쳤다. 그 순간에 집중했다. 마침내 센트럴 파크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그들에게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곳은 뉴욕 도심과는 완전히 분리된 또 다른 세계였다.
뉴욕을 여행한다면 꼭 센트럴 파크에 가야 한다. 그곳을 마냥 걷는 것도 좋지만, 산책만으로는 부족하다. 돗자리나 식탁보를 비롯한 천이 있다면 공원 어디서나 자리를 펴고 앉거나 눕길 권한다. 걱정하지 마라. 뉴욕은 타인을 신경쓰지 않는다. 평가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다.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뉴욕을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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