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일정이 절반이다. 장소를 선정하고, 일정을 정한 후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숙소까지 고르면 여행의 뼈대가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만 진행되면 그때부터 여행은 스스로 그 나름의 모습을 갖춰가기 마련이다. 다만, 이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혹자는 일정을 짜는 게 골치 아프다며 여행을 포기하기도 하니까. 여행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여행지를 고르는 건 온전히 취향에 따라 좌우되는 행복한 고민이니 특별한 조언이 필요 없다.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면 되니까. 또, 일정은 대체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으니 빠르게 결정된다. 하지만 어떤 항공사를 이용할지에 대해서는 따져 볼 여지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금액이 조금 비싸더라도 시간과 체력을 고려해 직항을 선호한다. 공항에서 흘리는 시간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이번 뉴욕 여행에는 아시아나를 이용했다. 항공사 한 곳을 정하면 마일리지 혜택을 볼 수 있다. 평소 마일리지 카드를 열심히 사용하다보면 어느샌가 공짜 티켓(실제로는 유류할증료 등은 지불해야 하므로 완전한 공짜는 아니다.)을 발권할 수 있다. 장하게도 인천-뉴욕 왕복 티켓 1명은 마일리지로 결제할 수 있었다. (2,027,500원짜리 티켓을 마일리지 70,000점과 415,600원으로 구입했다.)
여행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서 가장 골치아픈 부분은 '숙소'이다. 적당한 위치에 적당한 컨디션의 숙소를 적당한 가격에 얻을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물론 이때 '적당한'의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구체적인 일정과 예산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부터는 타협의 시간이다. 아무 걱정 없이 1박에 몇 백만 원씩 하는 최고급 5성급 호텔을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니까.
우선, 여행 기간 동안 줄곧 한 곳에서 머물지, 일정에 따라 여러 숙소를 옮겨다닐지 결정해야 한다. 숙소가 한 곳이면 체크 아웃/인 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풀어헤친 짐을 다시 싸는 것도 제법 스트레스다. 반면, 여행 일정에 따라 이동 시간이 많아지는 단점이 있다. 아무리 맨해튼의 면적(87㎢)이 좁다해도 왕복 이동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가장 이상적인 여행은 동네에 머무는 거니까.
다시 결론부터 말하면, 숙소는 총 3곳으로 정했다. 6월 24일부터 7월 8일(13박 14일 일정)이었는데, 로어 맨해튼 인근의 첫 번째 숙소에서 5박, 타임스 스퀘어 인근의 두 번째 숙소에서 7박, 로어 이스트 사이드 인근의 마지막 숙소에서 1박을 했다. 짐을 옮겨다녀야 하는 귀찮음에도 숙소를 쪼갠 이유는 맨해튼 각 지역의 분위기를 좀더 풍부하게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①Artezen Hotel(6월 24일-6월 29일)
비용 : 1,949,153원
②Romer Hell's Kitchen(6월 29일-7월 6일)
비용: 1,775,587원
③The Ludlow Hotel(7월 6일-7월 7일)
비용: 500,211원
합계 : 4,224,951원
첫 번째 숙소인 'Artezen Hotel'은 로어 맨해튼에 위치한 4성급 호텔이다. (구글 평점은 4.7점) 최근에 리모델링을 한 터라 룸 상태가 깔끔했다. 호텔의 평점을 깎아 먹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직원들의 친절도이다. 타지에 여행을 가는 입장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룸 상태가 아쉬우면 불편을 감수하면 그 뿐이지만, 인종 차별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면 여행 자체를 망치기 떄문이다.
Artezen Hotel 호텔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친절한 직원들'이라는 리뷰가 많았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곳에 머무렀던 기억을 떠올리면 다정했던 직원들이 떠오른다. 아침마다 직원들과 반가운 눈인사를 하고, 가벼운 아침 인사를 주고받았다. 또, 문을 열어주는 상냥한 도어맨과 날씨 등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 결국 그곳의 평판을 좌우하는 법이다.
호텔의 위치에 대해 설명을 좀더 해보자면, Artezen Hotel은 9.11 메모리얼과 월 스트리트 인근이고, 브루클린 브지도 도보로 8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북쪽으로는 시청 공원을 지나 걸어가면 소호(SOHO)까지도 금방이다. 남쪽으로는 배터리 공원이 도보로 12분 거리이다. 풀턴 스트리트 역과도 인접해 있어서 위치로 볼 때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로어 맨허튼은 자유의 여신상 보러 배 탈 때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솔직히 뉴욕을 즐기기에 로어 맨허튼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월 스트리트 등 중심가의 세련된 건물들이 뉴욕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면서도 밤이 되면 조용해서 안락한 느낌이 든다. 뉴욕 경찰(NYPD)의 사이렌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타임스 스퀘어의 혼잡함과는 완전 딴판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브루클린 브리지가 가까워서 아침마다 런닝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첫날은 배터리 공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뉴욕의 도심을 횡단하는 기분도 좋았지만, 역시 이스트 강을 가로지르는 브루클린 브리지를 힘차게 달리는 기분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한참 달린 후, 호텔 주변의 카페에서 커피(핫초코)와 뱅 오 소쿌라를 먹는 여유는 뉴욕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로어 맨해튼을 충분히 즐겼으니, 뉴욕의 중심으로 향할 차례이다. 고심 끝에 선택한 'Romer Hell's Kitchen'은 역시 4성급호텔로, 8번가와 9번가 사이에 위치해 있다. (구글 평점 4.2점) 타임스 스퀘어가 바로 지척이고, 센트럴 파크까지도 도보로 10분 거리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브라보 피자'가 1분 거리에 있다! 고된 일정을 마치고 야식으로 숙소에서 먹는 피자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정통 호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Romer Hell's Kitchen의 장점은 방이 넓다는 점이다. 숨통이 좀 트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캐리어 가방을 펼치기도 수월했고, 길다란 소파까지 놓여 있어 공간 활용도가 높았다. 애당초 룸 크기가 크지 않은데다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호텔 가격 때문에 맨해튼에서 이 정도 크기의 룸을 얻는 건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장점이 있는 호텔이다.
Romer Hell's Kitchen와 관련한 가장 많은 불만은 금전적인 이슈인데, 페널티와 추가 요금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다. 페널티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흡연비 500달러가 청구되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체크인 당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언급해서 확실히 해둔 터라 피해가 없었다. 또, 추가 요금은 체크인 당시 700달러가 결제됐지만, 체크아웃 후 281달러로 재결제돼 역시 문제 없었다.
로어 맨허튼을 다시 방문한다면 Artezen Hotel을 재방문할 의사가 있지만, Romer Hell's Kitchen의 경우에는 다른 선택지를 고려해 볼 것 같다. 타임스 스퀘어 인근에 워낙 많은 호텔이 있기 때문인데, 호텔 내에 헬스장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건 역시 브라보 피자가 선사했던 악마의 맛이었지만, 그러기엔 맨해튼에 호텔이 너무 많다고!
어떤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마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여행의 전체적인 인상 등 많은 것을 좌우된다. 우리에겐 '여행의 끝맺음'과 관련한 하나의 규칙이 있다. '마지막 하루만큼은 묵고 싶은 숙소에서 머물자.'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고단한 일정에 지친 우리에게 좋은 숙소를 선물하자는 취지다. 달리 말하면 '숙소 FLEX'라고 할까.
마지막 숙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어서 계속 비싼 호텔에서 묵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는 여행자들이 많다. 그럴 때는 마지막 숙소에 힘을 줌으로써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루쯤은 다른 비용을 줄여서라도 숙소에 돈을 써서 나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해보는 것이다. 비싼 숙소는 그 값을 하기 마련이니까.
아내가 선택한 곳은 'The Ludlow Hotel'이었다. 이미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들이 후기를 올려 제법 유명해진 호텔이다. 내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데, 특히 욕실에 예쁘다고 정평이 나 있다. 실내 조명이나 소품, 욕실의 수전(욕조가 있는 방은 반신욕을 하며 바라보는 뷰가 또 그렇게 예쁘다고 한다.) 등은 '예쁜 방이 무슨 소용이야'라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매료시킬 정도이다.
평소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는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숙소에 머무는 순간들을 만끽했다. 로비 층에는 로비 바와 Dirty French라는 식당이 있는데, 분위기가 근사하다. 또, 헬스장도 있어서 마지막 날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다. 헬스장은 옥상 층이라 문만 열고 나가면 탁 트인 시티뷰를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그날 밤 대화를 나누면서 2주 동안의 여행을 복기했다.
The Ludlow Hotel은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자리잡고 있는데, 뉴욕을 여행하는 입장에서는 좀 애매한 위치일 수 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면 아무래도 이 부근까지 오는 건 무리다. 아무래도 뉴욕의 중심은 타임스 스퀘어니까. 하지만 이 부근에 호텔이 제법 많은 까닭은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맨해튼을 벗어나고 싶은 여행자들의 니즈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는 몇십 년 전만 해도 위험 지역으로 분류됐지만, 지금은 그래피티가 그려진 낙후된 아파트와 세련된 샵들이 혼재하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또, 인근에 소호가 있어 쇼핑을 하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The Ludlow Hotel 바로 앞에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촬영 장소인 'Katz's Delicatessen'이라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는데, 웨이팅이 엄청나다.
뉴욕은 누구나 꿈꾸는 여행지이다. 한 해 방문자 수만 해도 5600만 명에 달할 정도다. (22년 통계) 그러다보니 호텔이 엄청나게 많고, 제각기 장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알아보고 고민한 다음에 선택할 것을 권한다. 수십 개의 리스트를 놓고 씨름을 하다보면 현태가 오기도 하지만, 좋은 숙소가 좋은 여행의 밑바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다만, 1박에 수백 만 원을 호가하는 호텔에도 악플이 존재하고, 불만 사항이 있는 걸 보면 무조건 비싸다고 좋은 건 아닌 듯하다. 많은 돈을 내는 만큼 기대치도 높아져 있을 테니 말이다. 각자에게 맞는 '적당함'을 찾는 것도 여행으로부터 얻는 배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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