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여행은 뉴욕으로 가는 게 어때? 뉴욕에 가고 싶어."
"음, 뉴욕? 아.."
여행 장소에 대한 선호도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나는 단연코 '유럽파'이다. 골목 구석구석마다 아름다움을 간직한 파리,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폭 그 자체인 남프랑스, 깔끔하고 정돈된 슈튜트가르트, 낭만적인 취리히,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프라하,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의 빈.. 역사와 문화로 숨쉬는 유럽의 도시들을 걷고, 그곳의 정취를 느끼는 걸 좋아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 초고층 건물들로 이어진 화려한 스카이라인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홍콩이나 도쿄처럼 복잡하고 혼잡한 도시는 질색이다. 갑자기 뉴욕에 가고 싶다는 아내의 제안(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누가 봐도 의미상 선언)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동쪽으로 날아가는 건 생각도 하지 않은 일이었기 떄문이다.
암스테르담, 베를린, 로마, 베네치아, 마드리드, 리스본, 자그레브 등 가보지 못한 유럽의 매력적인 도시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선순위에서 뉴욕은 한참 뒤에 있었다. 예정대로 순서를 지킨다면 죽기 전에 갈 수나 있었을까. 아직 채우지 못한 리스트가 넘치고 넘쳤지만, 이제 선택권은 없었다. 몇 달 뒤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던) 뉴욕으로 떠나야 했으니까.
"뉴욕과 사랑에 빠졌어."
고작 2주 동안에 불과했지만, 뉴욕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런 낯뜨거운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뉴욕을 여행하면서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떠올랐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나홀로 집에(1992)', '세렌디피티(2002)',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비긴 어게인(2013)', '인턴(2015)',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18) 등 영화 속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마다 설레고 행복했다.
뉴욕의 거리, 식당, 카페, 공원, 미술관, 재즈바, 공연장.. 둘러볼 곳은 너무 많았고, 시간은 지나치게 빨리 흘렀다. 뉴욕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뉴욕의 모든 곳이 좋았던 건 아니다. 그 정도로 객관성을 잃지는 않았는데, '뉴욕과 서울 중 어느 곳에 살래?'라고 묻는다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다만, 뉴욕은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고, 다시 꼭 머무르고 싶은 여행지로 각인됐다.
뉴욕 여행의 원칙은 세 가지였다.
① 최대한 많이 걷(고 뛰)자.
② 공원에서 휴식을 즐기자.
③ 문화예술을 최대한 체험하자.
굳이 뉴욕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가면 많이 걷는 편이다. '도보'를 기본으로 하되, '대중교통'을 곁들이는 식이라고 할까. 많이 걷고자 하는 이유는 여행지를 구석구석까지 알기 위해서다. 걷는 만큼 익숙해지고, 익숙한 만큼 알게 된다. 특정 목적지까지 빨리 가기 위해서는 택시, 지하철, 버스를 이용하는 게 유리하지만, 그리 했을 때 놓치는 풍경, 소리, 냄새 들이 아쉽다.
한 번 걸었던 길은 잊히지 않는다. 햇볕은 뜨거워도 습도가 낮아 상쾌했던 날씨부터 상가 앞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옷차림, 토마스 헤드윅의 리틀 아일랜드를 향하는 상쾌한 발걸음까지 기억된다. 브루클린 교, 윌리엄스버그 교, 맨해튼 교 등도 걸었다. '왜 사서 고생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순간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노을이 지는 뉴욕의 엄청난 야경 때문이다.
여행 초반에는 로어 맨해튼에 숙소를 잡았는데, 아침마다 런닝을 했다. 9.11 메모리얼을 지나 배터리 공원까지 뛰었고, 브루클린 다리 위를 달렸다. 마주치는 러너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뉴욕의 풍경에 나를 아로새겼다. 아침마다 잠에서 덜 깬 뉴욕을 만났다. 관광객은 없고, 뉴요커만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서 뱅 오 쇼콜라와 음료를 마셨다. 마치 뉴요커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처음부터 공원을 찾아가려고 한 건 아니었다. 뉴욕의 공원에 대해서는 '센트럴 파크' 정도밖에 몰랐으니까. 그런데 뉴욕에 대해 공부를 하다보니 뉴요커들이 공원을 유달리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루에 공원 한 곳은 꼭 가보자. 점심은 샌드위치를 사서 공원에서 먹자.'고 다짐했다. 배터리 공원, 볼링 그린, 시청 공원, 브라이언트 공원, 부시윅 인렛 공원 등으로 일정을 꽉 채웠다.
뉴욕 도심 속 공원들은 말 그대로 휴식의 공간이었다. 여의도 공원의 15배에 달하는 센트럴 파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돗자리 하나씩은 기본 옵셥인 듯한데, 다들 챙겨온 음식을 먹거나 과감하게 탈의를 하고 일광욕을 즐긴다. 그 자유로운 분위기에 동화되어 몇 번이나 그곳을 찾아 휴식을 취했다. 푸른 잔디가 펼쳐진 쉽 미도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조금 과장해서) 규모가 작은 공원들이 어딜가나 있었다. 그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 빌딩 1층에는 대부분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뉴욕에 머물다보니 왜 이렇게 공원이 많은지, 많아야만 하는지 이해가 됐다. 격자형 구조라 뻥 뚫린 대로가 있긴 하지만, 초고층 건물로 빽빽한 건물숲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 뉴욕의 숨구멍 같은 존재가 바로 공원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많은 뉴요커들이 'DIG'나 'sweetgreen' 등에서 원하는 샐러드를 조합해서 구입해 공원으로 이동한다. 물론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들고 오기도 한다. 공원이 야외 식당이 되는 셈이다. 식사가 끝나면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숨 돌리거나, 공원의 잔디밭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공원이 일상 속 루틴이 된 사람들이 보기 좋았다.
뉴욕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비롯해 MoMA라 불리는 뉴욕현대미술관,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노이에 갤러리, Salon 94, 휘트니 미술관 등 놓칠 수 없는 예술의 성지가 많다. 첼시에는 갤러리 디스트릭트가 있어 다양한 규모의 미술관이 거리마다 가득하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경매 회사가 소장한 미술품을 둘러볼 수도 있다.
미술관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최대한 많은 곳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짰다. 다만, 하루에 한 곳 이상은 가지 않으려 했다.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할 때 불가피하게 하루에 두 곳 이상의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모네나 피카소의 그림을 봐도 시큰둥해졌다. 그때 인풋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뉴욕 여행 일정이 충분하다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또, 다양한 공연을 경험하는 걸 주저하지 않으려 했다. 유명한 재즈바인 버드랜드에서 재즈 공연을 감상했고, 링컨 센터에서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도 관람했다. 마침 주연으로 출연하는 발레리나가 서희라는 한국인이라 더욱 감동스러웠다. 민스코프 극장에서 라이언킹 뮤지컬 원작을 보기도 했고, 양키 스타디음을 찾아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 MLB 경기를 직관했다.
2주 동안 뉴욕을 샅샅이 훑었다. 물론 여전히 뉴욕에 대해 모르는 게 훨씬 많지만,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뉴욕을 이해하려 애썼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사랑했다. 내가 기억히는 뉴욕은 다양성과 자유 그 자체였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성향,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이 어우러진 채 살아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누구도 누구의 시선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나'가 명징하게 살아 숨쉬는 공간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지하철은 더럽고, 거리에는 노숙자가 들어찼다. 물가는 살인적이다. 과도한 팁 문화는 어지럽기까지 하다. 인종차별도 만연하다. 그럼에도 다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을 사랑하게 됐다. 많은 단점이 있음에도 뉴욕을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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