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구입했던 책은 JIN. H(허미진)의 <여기, 내가 사랑한 뉴욕이 있어>였다. 뉴욕은 워낙 인기 여행지라서 다양한 여행 서적이 출간되어 있지만, 단순 정보를 제공하는 목적을 앞세운 딱딱한 책으로 시작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뭐랄까, 뉴욕을 '감성적'으로 만나보고 싶었다고 할까. 관광이나 여행을 하며 지나치는 게 아니라 정주하며 머물고 싶었다.
뉴욕에서 한 달 살기를 했던 작가의 실체적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행자의 입장이라면 아무래도 주요 관광지를 훑는 데 몰두하게 된다. 대표적인 랜드마크를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일정에 쫓기다보면 여행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비록 우리의 여행 일정은 2주(도 짧지만은 않다)에 불과했지만, 한 달 살기를 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지내고 싶었다.
<여기, 내가 사랑한 뉴욕이 있어>을 통해 한 도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비 맞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저자는 예기치 않게 쏟아지는 뉴욕의 비를 맞으며 그 순간마저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했는데, 실제로 뉴욕에 머무는 동안 비가 올 때마다 저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우천의 풍경들과 그 안에 속해 있는 우리의 모습이 그저 예쁘게 느껴졌다.
"우연히 트램을 마주한 그날부터 낮이든 밤이든 5번가에 있는 플라자호텔에서 동쪽으로 쭉 걸어가 루스벨트 아일랜드 트램을 왕복하는 것이 뉴욕에서 나만의 코스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트램에서 보는 해 질 녘의 뉴욕하늘과 맨해튼의 야경은 여행 중 벅찬 설렘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여기, 내가 사랑한 뉴욕이 있어>, p. 73)
뉴욕에 한 달 살기를 했던 저자가 가장 많이 찾았던 장소가 '루스벨트 아일랜드(Roosevelt Island)'였다는 건 의외였다. 솔직히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허나 저자는 해 질 녘이 되면 매일같이 루스벨트 아일랜드행 트램을 타고, 그 작은 섬에서 뉴욕의 하늘과 맨해튼의 야경을 즐겼다고 한다. 그 시간이 엄청난 위로가 됐다는 얘기에 일정을 짤 때 그곳을 포함시켰다.
루스벨트 아일랜드는 맨해튼 섬 안에 있는 또 다른 섬인데, 맨해튼과 퀸즈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강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섬으로 가려면 트램을 타야 한다. 이 트램은 강 위를 건너가기 때문에 케이블카라고 생각하면 그림이 쉽게 그려진다. 트램 한 대에 수십 명이 한꺼번에 탑승할 수 있고, 4-5분이면 루스벨트 아일랜드에 도착한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주인공들이 장롱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듯, 루스벨트 아일랜드행 트램도 비슷한 기능을 한다. 트램이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시야에서 빌딩 숲이 사라지고, 이스트 강의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진다. 뉴욕의 푸른 하늘이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내고, 강에 비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이 흥미로운 이동 과정은 짜릿한 흥분을 자아낸다.
"여기도 뉴욕이라고?"
트램에서 하차하면 뉴욕의 정체성에 의문이 들 정도로 조용해서 생경할 정도이다. 그만큼 루스벨트 아일랜드는 맨해튼과 완전히 다른 성격의 공간이다. 숨막히는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평화로운 섬은 여행의 피로를 씻기에 더할나위 없다. 섬을 따라 걷다보면 맨해튼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다, 이 곳은 맨해튼을 가장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기에 특별한 장소이다.
실제로 가보니 <여기, 내가 사랑한 뉴욕이 있어>의 저자가 왜 루스벨트 아일랜드를 좋아했는지, 시도때도 없이 그 곳을 왕복하는 트램에 올랐는지 이해가 됐다. 낯선 땅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루스벨트 아일랜드는 '마음 둘 곳'이었으리라. 언제든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트램 한 번이면 갈 수 있으니 부담도 없다. (게다가 메트로 카드가 있다면 무료이다.)
맨해튼을 보려면 맨해튼을 벗어나야 한다. 맨해튼의 빌딩 숲에 갇혀서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이는 뉴욕과 여행을 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한걸음 벗어나는 경험, 부감적(俯瞰的)사고가 요구된다. 루스벨트 아일랜드는 그런 시선을 부여하는 공간이었으리라. 나 역시 잠시나마 뉴욕을 객관화하고, 나의 여행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유가 가득했던 판타지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루스벨트 아일랜드에서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오면 꼭 들르면 좋은 디저트 카페가 있다.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 3'다. 트램 역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동명의 영화 제목을 떠올리는 올드 영화 팬도 있을 텐데, 실제로 영화 속 주인공이 만났던 장소가 맞다.
사라(케이트 베킨세일)와 조나단(존 쿠삭)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영화 속 감동이 갑절이 되겠지만, 웨이팅이 제법 있는 핫플이라 남는 자리가 있다면 그저 감지덕지다. 영화에 등장해서 더욱 유명해진 건 사실이나 '세렌디피티3'은 무려 1954년 오픈한 역사가 깊은 디저트 가게이다. 메릴린 먼로, 앤디 워홀 등 유명 인사들의 단골 카페로 알려져 있다.
카페 인테리어는 독특함 그 자체인데, 기본적으로 내부의 색감이 매력적이고, 소녀 감성으로 가득한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인상적이다. 조금 촌스러운 느낌이나 이색적이고 독특한 분위기라 앤디 워홀이 왜 이 공간을 사랑했는지 알 듯했다. '세렌디피티3'의 시그니처 메뉴는 '프로즌 핫 초콜릿'인데, 압도적인 비주얼에 머리가 띵하고 아플 정도의 단맛을 선사한다.
세렌디피티는 '의도치 않은 발견', '우연한 행운'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세밀하고 정교하게 여행 일정을 짜도 의도치 않은 일이 생기고, 우연한 상황이 발생한다. 예전에는 그런 변수들을 견디지 못했지만, 지금은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번 뉴욕 여행에서도 수 차례 나만의 세렌디피티를 만았고, 그 목격 속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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