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당신의 글은, 당신의 소통은 누구를 향해 있는가?

너의길을가라 2013. 11. 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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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보니까 모든 사람이 3 : 4 : 3으로 나뉘어요. 내 편 3, 중도 4, 죽었다 깨어나도 나랑 안 맞는 사람 3. 그 중 4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잘못해서 4를 놓치면 내 편인 3만 남아요. 그리고 그 3이 다시 전체가 돼서 3 : 4 : 3으로 또 쪼개져요.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없다. 분명한 아군이 존재하고, 분명한 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우치면 삶은 훨씬 더 수월해진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랑 안 맞는' 3에 쏟는 힘과 노력을 아껴 집중해야 할 부분에 온전히 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 '내 편'이 아니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강신주의 '3 : 4 : 3' 론(論)은 마치 진보(3) : 중도(4) : 보수(3)의 정치 지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중도는 실체가 없다는 이야기는 이전의 글에서 수차례 반복했으니 다시 언급하진 않도록 하자. 현실적인 '중도' 개념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다수'의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결국 설득의 주체는 확고한 주장을 갖고 있는 진보와 보수일 수밖에 없고, 중도는 진보와 보수의 주장들을 비교해서 보다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쪽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글을 쓸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는 명백하다. 


"글이란 누구를 만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속단해서는 안 돼요. 제 입장과 다른 사람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해요. 절대 편 가르기 해서는 안 되고, 쪼개서도 안 돼요. 내 편의 지지, 그거 의미 없어요.

 

속단해선 안 될 뿐더러 나의 생각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설득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편 가르기도 금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편의 지지'를 받는 것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글을 쓸 때, 한 쪽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가령, 새누리당의 입장에서 글을 쓰거나 혹은 민주당의 시각에서 글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그에 대해 맞장구만 쳐주면 된다. 하지만 그런 글이 '의미'가 있을까? '내 편의 지지'는 받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 순간적으로 통쾌함을 느낄 순 있겠지만 그걸로 충분한 것일까? 내가 설득해야 하는,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그 글을 어떻게 읽을까? 모르긴 몰라도 '냉소'를 보내지 않을까?



특정한 독단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는 당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을 벗어나 다른 집단이 지닌 견해를 알아보는 것이다. … 만약 여행을 할 처지가 아니라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도록 하라. 또 당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소속된 신문을 찾아 읽도록 하라. 당신이 보기에 그 사람들과 신문이 미쳤거나 심술궂거나 사악하다면, 당신 역시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양쪽 모두 옳을 수는 있지만 양쪽 모두 틀릴 수는 없다. 이렇게 반성하다 보면 틀림없이 신중한 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인기 없는 에세이』



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대한민국의 상황에 고스란히 옮겨오기엔 조금 나이브한 면이 있지만, '균형'과 '신중'의 중요성에 대한 역설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나 자신이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지, 우리는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내가 속한 사회적 집단', 그 협소한 '우리'에서 벗어나 다른 집단들의 견해들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과 우리 사이의 접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우리와 다른 것은 부정의이고,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중간에 서 있는 4조차도 적으로 돌리는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 한마디로 고립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트위터가 위험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 속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은 가차없이 '언팔'을 해버린다. 결국 내 주위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존재하게 되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착각에 빠지게 된다. 확증편향의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가령,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은 <한겨레>와 <경향신문>만 읽고, 그 언론의 기사들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반대로 보수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강화시켜 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평소에 정보를 습득하는 출처들을 점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신뢰도가 적절한지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아무 의심없이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출처는 어디인가? 반면에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귀를 막아버리는 곳은 없는가? 

 

줄리언 바지니, 『가짜논리』中 -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우리는 줄리언 바지니의 조언을 가슴 속에 새길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신뢰를 깡그리 무너뜨리라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의 의심 정도는 갖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언제나 위험한 법이니까 말이다. 어떤 매체라고 할지라도 100% 정확할 순 없는 법이고, 때로는 잘못된 관점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한 오류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진영논리'에 빠져있다면 그런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편은 항상 옳아야만 하니까. 혹은 우리 편이 저지른 건 티끌과 같은 실수에 불과할 뿐이니까. 


당신의 글은 '누구'를 향해 있는가? 단지, '글'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당신의 '소통'은 '누구'를 향해 있는가? 이미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내 편'인가? '내 편의 지지'를 통해 우리만의 세상을 강화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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