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 사랑했던 것, 소중히 아꼈던 무언가.
그것들을 기억 저 밑바닥에서 끄집어낼 때,
고야는 꼭 그 냄새에서 시작한다.
고야는 경험하지 못했던 …… 것들.
- 사쿠라바 가즈키, 『고야』中 -
나오키 상 수상작가 사쿠라바 가즈키가 그려낸 특별한 연애소설 『고야』. 의붓아버지와의 금단의 사랑을 다룬 장편소설 ≪내 남자≫로 제138회 나오키 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의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른 사쿠라바 가즈키가 수상 직후 발표한 색다른 연애소설이다. ‘황야’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춘기 소녀가 겪는 사랑과 우정, 이별과 성장 이야기를 순정만화를 연상시키는 세심한 터치로 그려냈다. 기존의 작가 이미지와 사뭇 다른 분위기의 순수하고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일본 전통을 간직한 고풍스러운 도시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사쿠라바 가즈키..
뇌리 속에 강렬하게 기억되어 있는 이름.
몇 년 전이었더라? 『내 남자』라는 책을 무심코 집어 들고, 그 문체의 힘과 가공할 만한 흡입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2008월 12월에 출판이 됐더라.. 그보다는 뒤의 일일 테니 대략 3~4년 전? 그 이후로 '사쿠라바 가즈키'의 다음 작품을 늘 기다려왔다. 조용히, 마음 속으로, 진득하게..
『고야』
드디어 그녀의 신간(번역본)이 나왔다. 고민이 필요 없이,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책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읽어나갔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 정말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는 아껴 읽는 버릇이 있다. 조금씩, 조금씩 읽었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많이 행복했다. 매일매일 만나는 글자들이지만, 사쿠라바 가즈키가 조합한 글자들은 특히 반가웠고, 그 오묘한 배열들에 눈과 머리와 마음이 즐거웠다.
글은 한층 밝아졌다. 사춘기 소녀의 시각에서 쓰인 소설답게 발랄하고 생동감이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우울'은 여전했다. 예쁘게 잘 감춰뒀더라. 사실 성장 소설은 좀 지겨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쿠라바 가즈키의 것은 오히려 좋았다.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문장 혹은 문체가 갖고 있는 힘과 매력인가보다.
『내 남자』에서도 그랬지만, 사쿠라바 가즈키는 '냄새'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 냄새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첫 번째 감각은 '냄새'가 아닐까..? 익숙한 샴푸 냄새라든지, 비누 냄새 혹은 향수 냄새.. 분명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냄새들이 있다. 거리를 걷거나 건물 등에서 누군가를 지나쳤을 때, 코끝을 스쳐지나가는 냄새들..! 그리고 아련히 떠오르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
가쿠다 미쓰요의 『대안의 그녀』가 성장의 아픔을 절실히 그려냈다면, 사쿠라바 가즈키는 성장 그 자체의 놀라움을 그려냈다. 내가 일본 소설을 찾아 읽는 이유는, '감성'이 건조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물론 일본 소설만의 특유한 정서에 약간의 유대감도 있다. 또,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을까?' 싶은 기발한 상상력도 마음에 들고, 때로는 깊고 때로는 나른한, 감성적인 느낌들도 좋아한다.
마음에 들었던 사쿠라바 가즈키의 문장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좋은 소개가 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한번쯤 관심을 갖게 하는 글이 됐길..!
칭찬받기를 바라고 만든 음식은 아무리 맛있어도 어딘가 쓰다.
- 사쿠라바 가즈키, 『고야』, p.102 -
"…… 간나즈키가, 돌아오지."
"으응."
"내내 기다린 거지? 야마노우치 너, 진짜 질긴 여자다."
상처라도 주고 싶은지 거친 목소리로 말한다. 고야는 자신이 별달리 상처받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여자의 마음이란 참으로 인정머리가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말 따위에는 상처받지 않는다.
- 사쿠라바 가즈키, 『고야』, p.361 -
"사랑은 여자를 아이로 만들어버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는 것은 순간뿐, 그런 느낌."
- 사쿠라바 가즈키, 『고야』, p.376 -
그리움은, 외로움.
그렇게 수많았던 몽실몽실한 감정에 날마다 허덕였는데.
어른이 된 지금 기억하는 것은 과연 무엇과, 무엇과, 무엇일까.
잊혀 사라진 것은 어떤 그리움이며 어떤 외로움일까.
그것들은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까.
투명한 거품처럼 태어났다가 사라져간 것들.
시간이 흘러서.
때로는 멍하니 있는 고야 자신마저도 내버려둔 채 흘러서.
돌아보면 그 계절은 순식간.
깜빡 눈 감았다 뜰 정도로 한순간인 날들이여.
여전히 소녀는 그곳에 있다.
아득한 황야에서 서성대고 있다.
바람이 불면, 소녀의 머리카락이 살랑대고……
- 사쿠라바 가즈키, 『고야』, p.380 -
고야가 말할 때마다 유야가 몸을 기울여가며 한쪽 귀를 고야의 입술 가까이 댄다. 고야는 어리광부리듯 까치발을 딛고 이야기한다.
이렇게까지 몸을 밀착시키고 대화하는 상대는 친구나 가족중에도 달리 없다. 고야는 사랑이라는 특수한 인간관계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 사쿠라바 가즈키, 『고야』, p.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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