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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 감독의 예고된 사퇴, 쉼 없이 달려온 10년 그리고 재충전

너의길을가라 2015. 2. 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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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성적이 좋지 않은데, 그만 둬야지. 당연한 일이야"


어느 정도 예고된 사퇴였지만, 그래도 역시 쓰고 아리다. 정작 당사자는 담담한 듯 하다. '농구 대통령' 허재 전주 KCC 감독이 9일 전격 사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 시즌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전창진 부산 KT 감독과 허재 감독에 대한 사퇴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감독들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타진했었다. 그리고 허재 감독이 먼저 감독직을 던지고 말았다.



최근 3시즌 동안 KCC가 거든 성적은 10위-7위-9위(현재)이다. 성적만을 놓고 본다면 사퇴는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2005-2006 시즌 KCC의 2대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10년 동안 챔피언결정전 우승 2회, 준우승 1회, 4강 플레이오프 진출 2회, 6강 플레이오프 1회라는 성적을 거두면서 KCC 왕조로 구축한 바 있는 허재 감독이기에 한 번의 기회를 더 줘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 허재 감독은 KCC와 팬들에게 있어 상징적인 존재였던 셈이다.


부상 악령에 시달린 KCC


▶ 음주운전 교통사고 김민구 고관절 수술 (2014년 6월 9일)

김태술, 김효범에 이어 하승진까지? 너무 아프다 (2014년 12월 9일)

'안풀리는' KCC, 김태술 오니 하승진 또 부상 (2015년 1월 2일)


게다가 허재 감독에게는 (그로서는 마뜩지 않겠지만) 분명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2011-2012 시즌까지 강팀의 면모를 자랑했던 KCC는 하승진의 군 복무 대체, 혼혈선수 제한에 따른 전태풍의 이적, 추승균의 은퇴로 세 명의 주축 선수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면서 급격한 추락을 경험했다. 2012-2013 시즌 최하위의 성적은 그로 인한 불가피한 여파였다.


ⓒ KBL


2013-2014 시즌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국가대표 가드 김민구를 지명하면서 팀 리빌딩에 초석을 다졌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허재 감독으로서는 이를 악물고 2014-2015 시즌을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하승진이 복귀하는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6년 주기설'의 주인공인 정통 포인트 가드 김태술을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하면서 단숨에 팀 전력을 우승권으로 올려놓았다.


김태술-김민구-하승진으로 이어지는 국가대표 라인업은 제대로 가동조차 해보지 못하고 표류하고 말았다. 김민구는 2014년 6월 음주 교통사고를 저지르고 고관절과 손등 수술을 받으며 팀 전력에서 이탈했다. 허재 감독과 KCC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태술은 아시안게임에 차출되면서 팀 전술에 녹아들지 못했고 급기야 허리 부상 등 잔부상에 시달리며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을 기록했다. 여기에 하승진도 시즌 내내 부상과 복귀를 반복하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꿈의 라인업'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KCC는 끝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이쯤되면 허재 감독도 손을 써 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팀 성적이 나쁜 탓이었을까? 최근 들어 KCC 선수들은 승패를 떠나 경기 내용 면에서 지나치게 형편 없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이 누적되면서 팬들은 실망감을 금치 못했고, 그만큼 KCC를 향한 팬들의 질책은 강해지기만 했다.


지난 6일 서울 삼성과의 원정경기에서는 KCC의 팀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경기 종료 28초 전 KCC 벤치 쪽으로 나가는 볼을 살리기 위해 몸을 날린 하승진은 무게 중심을 잃고 그대로 광고판을 넘어 벤치로 쓰러졌다. 보기에도 아찔한 장면이었다. 주위에 있던 김효범 등은 넘어지는 하승진을 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몇몇 선수들은 이 상황을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물론 이 장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되는 집안의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 바스켓코리아


허재 감독과 친형제 이상의 돈독한 사이로 유명한 KCC 최형길 단장은 "사퇴는 전부터 얘기 했었다"면서 "남은 경기가 뭐가 중요하냐고. 의미가 없다고. 그래도 시즌은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만류를 했는데, 결국 그만두겠다고 하더라. 이제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레이저도 한 두 번이고, 욕도 한 두 번이지. 그게 통해야 하는데…. 점점 무뎌져 갔던 것 같다"고 밝혔다. KCC의 팀 분위기 그리고 선수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 듯 하다.


허재 감독은 <스포츠조선> 류동혁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뭐, 일단은 그냥 쉬어야지. 그동안 힘들었어"라며 10년 동안의 감독 생활에 대한 소회를 짤막하게 밝혔다. 얼마 전 부산 KT의 전창진 감독이 팀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원에 입원하는 등 감독들이 겪은 압박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한 농구 관계자의 말을 빌리자면, "경기 결과에 따른 감독의 부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사퇴한 허 감독뿐만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경기를 치르는 감독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카메라에 잡히는 감독들의 얼굴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만 하다.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감독들의 혈압은 요동친다. 뒷목을 잡는 감독(이상민 감독)의 모습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감독을 맡자마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피부는 푸석푸석해지는 등 급격한 노화 현상을 겪기도 한다. 이번 시즌 원주 동부의 지휘봉을 잡은 김영만 감독은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 점프볼


"본인은 시원하기도 할 거다. 성격이 워낙 뒤를 안 돌아보는 성격"이라는 최형길 단장의 말처럼, 허재 감독은 "이제 전화 끊어. 나 바빠"라며 기자와의 전화를 끊고 사라져버렸다. 후련한 듯 떠나버린 허 감독이지만, 분명 이것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성큼성큼 떠났던 만큼 다시 성큼성큼 나타날 것이다. 무려 1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그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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