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책임지지 않는 대한민국,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나?

너의길을가라 2014. 7. 4.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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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개막을 약 한 달 앞둔 지난 5월 12일, 홍명보 감독은 파주 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다. 홍 감독은 이 자리에서 거듭 지적되어 온 '엔트으리'에 대해 "원칙을 내가 깨트린 것이 맞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그는 "선발되지 못한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월드컵에서 뛸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을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다. 어떤 선발이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 선수들을 데리고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최고의 성과'를 내겠다고 국민 앞에 장담했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거둔 결과는 1무 2패로 16년 만에 최악의 성적표이었다. 이른바 '월드컵 참사'였다. 물론 결과 자체도 '참사' 수준이었지만, 그보다 경기의 내용적 측면에서 너무나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 더욱 실망스러웠다. 처참한 경기력이 이어지면서 결국 원칙을 어기고 선발했던 '엔트으리'로 인한 예고된 참사였다는 점이 더욱 부각됐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차범근 감독은 1차전에서 멕시코에 1대3으로 역전패 하고,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0대5로 참패를 당한 책임을 지고 축구협회로부터 경질 통보를 받았다. 월드컵 도중에 대표팀 감독이 경질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전례에 비추어 보자면, 홍명보 감독의 경질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게다가 '엔트으리' 논란으로 국민적 공분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센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의 결정은 '경질'이 아닌 '유임'이었다. 지난 3일, 대한축구협회 허정무 부회장은 "국민들의 희망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브라질로 떠났지만 좋지 않은 성적으로 돌아와 머리 숙여 깊게 사과한다. 모든 질책은 달게 받겠다. 홍명보 감독 개인의 문제로 매듭짓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준비기간도 짧았던 만큼 홍 감독을 계속 지지하고 신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홍명보 감독의 의사는 무엇이었을까? 허정부 부회장은 "벨기에전이 끝난 뒤 홍 감독은 황보관 기술위원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홍 감독의 사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허 부회장은 "협회는 이번 월드컵의 결과에 대해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를 준비하기에 많이 부족했다고 보고 1년이라는 기간을 홍 감독에게 부여했던 협회 책임이 더 크다는 판단"했다며 홍 감독 유임의 이유를 설명했다. 


대한축구협회가 홍명보 감독의 유임을 결정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두 가지다. 


1. 내년 1월 아시안컵 대회까지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감독을 선임하는 것은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다.

2. 홍명보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치른 월드컵이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모두 홍명보 감독에게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


참으로 궁색한 이유들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대한축구협회는 '경질은 없다'고 못을 박았던 것 아닌가? 어찌됐든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감독의 책임뿐만 아니라 협회의 책임을 인정했다. 게다가 허 부회장은 '협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말뿐이었다. 이번 '월드컵 참사'와 관련해서 그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던 홍명보 감독도 유임됐고, 더 큰 책임이 있는 대한축구협회도 "월드컵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겠다"는 뻔한 말만 되풀이하면 책임으로부터 도망쳤다.


3일 저녁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허정무 부회장은 '홍명보 유임' 결정에 대한 보다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우리나라의 축구 재산인데 우리가 보호해야 되지 않느냐. 그리고 기회를 더 주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는 것이다. 역시 '의리' 논란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수준이다. 홍명보가 대한민국의 축구 재산이므로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면, 적어도 대한축국협회의 누군가가 대신 책임을 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 <미디어오늘>에서 발췌 -


대한축구협회의 이러한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결정을 보면서 '책임지지 않는 대한민국'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됐다. 지난 6월 30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거듭된 청와대의 인사 실패의 원인을 청와대의 부실한 인사 검증 시스템과 자신의 잘못된 인선 탓이 아니라 국회와 언론의 잘못으로 돌려버렸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키는 결정에 대해서 "총리 후보자의 국정수행 능력이나 종합적인 자질보다는 신상털기식 여론 재판이 반복돼서, 많은 분들이 고사를 하거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면서 "국정 공백과 국론 분열이 심화되고 혼란이 지속되는 걸 방치할 수 없어서 고심 끝에 정홍원 총리의 유임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관피아 척결'을 내세워 지명했던 안대희 전 총리 후보자는 '전관예우' 사실이 드러나 낙마했고,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경우는 더 이상 말하는 것이 피곤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청문회를 받고 있는 장관 후보자들의 경우에도 '논문 표절', 칼럼 대필', '자녀 병역 특혜', '취업 특혜' 등의 논란에 휩싸여 있다. 



- <세계일보>에서 발췌 - 



이러한 논란 투성이의 후보자들을 총리 혹은 장관 후보자를 지명한 책임은 1차적으로는 청와대 인사 검증팀과 인사위원장인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대통령에게 있다. 하지만 거듭된 인사 참사에도 누구 한 명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책임을 국회와 언론의 잘못인 것처럼 호도했다.


지난 2003년 5월 '윤창중 사태'가 터졌을 때, 청와대는 "인사시스템을 제도적으로 보완해 시스템을 강화하겠다. 인사자료도 차곡차곡 쌓으면서 상식적으로 검증하는 체제로 바꿔나가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지킬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똑같은 사태가 재현됐지만, 청와대는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 


'인사 참사'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청와대와 박근혜 대통령, '엔트으리'로 인한 '월드컵 참사'에 대해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대한축구협회와 홍명보 감독. 이들은 쌍둥이처럼 닮아있지 않은가? 물론 '사과'를 했다는 점에서는 대한축구협회가 반 발짝 앞서 있긴 하지만,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가 아닌가? 


앞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책임을 지는 것'이 '바보 같은 짓'으로 규정될지도 모르겠다. '책임을 왜 져? 버티면 되는데?'의 표본을 청와대가 몸소 국민들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대한축구협회도 복사기처럼 똑같이 담습했다. '책임지지 마라. 버티고 또 버텨라'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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