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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탐조 생활' 우리 아파트엔 몇 종의 새가 살고 있을까

너의길을가라 2021. 7. 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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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은 여행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에서 여행 후의 상실감에 대해 얘기하다가 "여행과 닮았지만, 여행보다 상실감이 덜한 행위가 나에게는 탐조 생활인 것 같"다며 새로운 취미를 소개했다. "언제부터 탐조를 시작했는지 콕 집어 말하기가 어렵"지만 "어느새 하고 있었"다며 파주, 경주, 순천만, 연천, 강원도, 제주도 등을 다니며 새를 관찰했던 기억을 꺼내놓았다.

그는 "새들의 이미지는 내 안에서 덜 유실되는 것 같"다며 "상실감 없는 취미를 찾은 것이 기쁠 뿐"이라고 글을 맺었다. '새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토록 강렬한 기억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탐조'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제법 유명한 곳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하지 않을까. 집 주변에서 하기는 힘들겠지.'라며 혼자 고민했다.

"아파트에서 새를 본다는 건, 자연과 내가 연결되어 있고 그 자연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아파트 탐조단 박임자 씨)


그 고민은 지난 4일 방송된 SBS <물은 생명이다> '아파트에서 새를 만나다, 아파트 탐조단' 편을 통해 말끔하게 해결됐다.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 이른 아침부터 쌍안경과 카메라를 들고 어디론가 길을 나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파트 탐조단' 박임자 씨와 박경희 씨였다. 그들이 찾은 곳은 어디 먼 곳에 있는 숲이나 강이 아니라 아파트 내에 조성된 정원이었다.

두 사람은 아파트 정원수의 열매를 먹고 있는 참새를 발견하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조심히 담았다. 새끼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참새들이 이 곳에서 번식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아파트 정원을 보금자리로 삼았다는 얘기다. 또, 근방에는 아파트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새이자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깨우는 직박구리도 만날 수 있었다.

박임자 씨는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아파트 탐조나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작년 1월 먹이대를 설치하자마자 새들이 어마어마하게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겨울 철새인 홍여새, 콩새, 되새부터 보기 힘들다고 여겼던 동박새까지 볼 수 있었다. 그쯤되니 '우리 아파트에 이런 새들이 있었어?'라고 감탄하게 됐고, 탐험해볼 만한 곳이라 여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 탐조단' 활동이 시작됐고, 새에 관심이 많은 주민들이 여럿 합류했다. 박임자 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주위로 너른 들과 천이 있고, 20년 이상 훌쩍 자란 나무들이 울창한 곳이었다. 새들에게도 도심 속 귀한 쉼터이자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새들이 왜 자연을 두고 굳이 아파트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걸까.

사실 베란다를 비롯해 아파트는 여러 구조물들은 새들의 입장에서 보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또, 아파트에 있는 여러 구멍들, 이를테면 에어컨 실외기를 연결하기 위한 공간이나 연통 등은 새들이 머물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천적으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20층의 실외기 뒤편 공간에 천연기념물 황조롱이가 날아들어 2번이나 번식을 하기도 했다.

혹시 새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박임자 씨는 베란다에 먹이대를 설치해 새들이 날아와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울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이를 '버드피딩(Bird feeding)'이라 한다. 다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안전사고가 없도록 먹이대를 단단히 고정하고, 이우집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설물 받침대를 설치해야 한다. 또, 날아가지 않도록 무거운 그릇을 사용해야 한다.


새들마다 좋아하는 먹이가 달라서 어떤 새는 씨앗, 곡류 종류를 먹고, 어떤 새들은 홍시나 귤을 좋아한다. 박임자 씨는 들깨, (껍질 없는) 해바라기씨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사실 '물'이다. 아파트 단지의 경우 새들이 물을 공급받을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박임자 씨의 베란다는 새들에게 맛집으로 소문이 나 지금도 다양한 새들이 찾는 핫플이다.

탐조를 통해 박임자 씨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찾은 새는 무려 47종에 달했다. 이렇게 많은 새가 살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도 처음에는 이토록 많은 새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지만, 하루하루 아파트를 탐조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게 많은 새를 만나게 됐다며 소회를 밝혔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새의 그림을 그린 어머니와 함께 '아파트 새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작년 국토교통부가 공개한 '2019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주택유형 중 아파트 비율이 50.1%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는 우리에게 잠자리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박임자 씨는 자신도 탐조를 하기 전에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아파트에 정원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지만, 산책을 하면서 새를 보다보니 새로운 공간들을 찾게 됐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관심이 생겼고, 그 관심은 결국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새들에 대한 관심도 높였다. 박임자 씨는 시청자들에게도 아파트 탐조를 권했다. (반드시 아파트가 아니어도 좋다. 새들은 언제나 주변에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파트에서 탐조를 하려면 뭘 준비해야 할까.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박임자 씨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산책을 하면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새들이 있는지 인식하는 게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돌다가 '저 새가 자세히 보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면 쌍안경을 준비하고, 도감을 구입해서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설명했다.

생각해 보면 이른 아침마다 들려왔던 새소리는 직박구리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화단 근처에서 바삐 움직이던 참새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큰 나무 위에 둥지를 치고 있는 새의 이름을 무엇일까.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어딘가에서 새의 번식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베란다에 먹이대를 설치하면 어떤 새들이 찾아올까. 우리 아파트에는 몇 종의 새가 살고 있을까. 탐조에 대한 관심이 용솟음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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