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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후 간을 나눠먹은 영웅파, 여전히 감흥없었던 '표리부동'

너의길을가라 2021. 7. 2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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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마킹할 대상이 있다는 건 혁신과 성장에 있어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다.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그 분야의 선도하는 대상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과정은 필수적인 일이다. 물론 비교 대상으로 여긴다면 부담이 되겠지만, 발전의 디딤돌 혹은 지렛대로 감는다면 성장 동력이 된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소재, 콘셉트로 방송된 프로그램이 이미 존재한다면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최근 들어 범죄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방송가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KBS2 <표리부동>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부터 tvN <알쓸범잡>까지 참고할 선배들이 있었다. 물론 '모방'의 낌새는 단박에 드러난다. 화자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는 건 <꼬꼬무>에게서, 청자를 설정해 대화를 나누는 건 <알쓸범잡>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관건은 벤치마킹의 결과이다. 참고한 대상보다 더 나아졌는가. <표리부동>은 그 질문에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표창원과 이수정, 범죄 수사와 범죄 심리 분야의 최고의 권위자이자 전문가를 섭외해 놓고도 그 역량을 충분히 끄집어내지 못했다. 교차 편집은 <꼬꼬무>와 달리 오히려 집중력을 떨어뜨렸고, 분위기는 <알쓸범잡>에 비해 딱딱할뿐더러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일방적이다.

주제 면에서도 특별할 게 없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마지막 연쇄살인마(1회)', '가스라이팅 사건(2회)', '존속살인(3회)', '영웅파 살인사건(4회)'을 다뤘는데, 이미 다른 프로그램에서 한 차례씩 건드렸던 내용이라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 없었다. 이는 후발 주자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좀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악마의 디테일'을 보여주든지, 다른 관점을 제시하든지 말이다.


지난 28일 방송된 <표리부동>은 '범죄와의 전쟁'을 다루며 '영웅파 살인사건'을 끄집어냈다.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한국전쟁 이후 가장 치열한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폭력조직 일망타진이 시작됐다. 약 1만 6000명이 충원된 경찰은 역량을 총동원해 전국의 274개 폭력조직을 와해시켰다. 거물급 조폭 두목들이 검거됐다.

그렇게 범죄와의 전쟁은 끝나는 듯했지만, 검거됐던 두목들이 하나둘 출소하면서 신흥세력들이 새롭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영웅파'라는 작은 조직도 그 중 하나였다. 1998년 10월 서울지검을 찾아온 영웅파 조직원 유 씨는 같은 조직의 조직원을 살해했다고 자수했다. 이른바 '사람을 죽였고 간을 먹었다'는 그 충격적인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새벽 5시 편의점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발생한 시비였다. 조직의 2인자 창 씨와 조직원 곽 씨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창 씨의 여자친구도 동석한 자리에서 곽 씨가 장애가 있는 창 씨에게 "장애인이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하네?"라고 조롱하고, 창 씨의 여자친구를 성추행하고 욕을 한 것이다. 자신보다 3살 어린 곽 씨의 무례함에 화가 난 창 씨는 경고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보다 못한 조직의 행동대장 박 씨가 나서서 곽 씨를 폭행해 기절시켰다. 그리고 곽 씨를 아지트로 데려가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살인까지 계획한 건 아니었고, 단지 혼을 내줄 생각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곽 씨가 복수를 하겠다며 저항하자 폭행 강도는 점점 세졌다. 이어 창 씨는 버릇없는 곽 씨를 죽이자고 제안했고, 이 씨가 곽 씨의 복부를 흉기로 찔렀다.

이후 창 씨는 한 사람만 죽여서는 안 된다는 섬뜩한 의견을 제시했다. 편의점 사건을 알고 있으며 곽 씨와 친한 조직원 유 씨도 함께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행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창 씨가 유 씨을 아지트로 유인했고, 이 씨가 살해하겠다며 위협했다.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유 씨는 협박에 두려움에 떨다가 범행에 가담하기로 약속했다.

그렇다면 누가 곽 씨의 간을 먹자고 했던 걸까. 놀랍게도 그건 바로 조직원 유 씨였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곽 씨의 사망 과정을 지켜본 곽 씨는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자신도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그와 같은 제안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범행 5일 후 유 씨는 검찰을 찾아 자수를 했다. 심경에 변화가 있었을까. 표창원 프로파일러는 유 씨의 경우 자신은 다른 이들에 비해 죄질이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공범 관계가 될 것이기에 처벌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이라 추측했다. 실제로 이 씨는 사형, 창 씨와 박 씨는 무기징역, 자금책 정 씨는 25년 형을 받았지만, 유 씨는 징역 10개월에 그쳤다.

반면,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피의자도 트라우마가 생긴다며, 유 씨가 곽 씨의 사망 과정이 떠올라 괴로움을 겪는 등 심리적 트라우마 때문에 자수를 선택했던 것이라 분석했다. 표창원은 악독한 범죄를 저지렀던 영웅파의 민낯은 참으로 볼품없었다며 정 씨의 주도로 보험 사기를 하며 자금을 마련했던 영웅파의 초라함과 지질함을 지적했다.

표창원과 이수정의 영웅파 이야기는 사건 발생 10년 후 이 씨가 '모든 건 창 씨의 지시였다'며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이 씨는 재심 청구의 근거로 감옥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창 씨의 유서를 제시했으나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사형 집행에 대한 가능성이 있어 이 씨가 사형을 모면하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표리부동>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아쉽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굳이 벽을 치고 테이블을 나눠 따로 얘기를 나눠야 할까. (혹시 방역 조치일까?) 그리고 그걸 교차 편집을 통해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꼬꼬무>처럼 여러 화자가 각자의 개성을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고 볼 수도 없고, <알쓸범잡>처럼 사건과 관련된 장소를 방문해 흥미와 집중도를 높이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표창원과 이수정을 한 테이블에 모아두고 심도있는 토론을 벌이게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훨씬 긴장감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중간중간 표창원과 이수정이 개입해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주는 편이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실제로 두 사람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자신만의 강점이나 개성을 드러내보이지 못하고 있다.

<표리부동>은 내로라하는 전문가를 섭외했음에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심층적인 분석을 보여주지 못했다. 밴치마킹한 프로그램들의 장점에 비해 조금씩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다. 또, 주제 선정에 있어서도 별다른 특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타 방송에서 여러 차례 다뤘던 내용들이라 신선함도 떨어진다. 시청자들이 범죄라는 소재에 관심있는 건 사실이나 손쉽게 만들어도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작진의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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