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벌금형 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다

너의길을가라 2013. 3. 25.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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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벌금'에 대한 논의가 아주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요.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이털남' 307회에 출연(2013년 3월 21일)해서 '벌금이야기'를 통해 군불을 지폈습니다. <한겨레21>에도 글을 실으셨더군요. 사실 벌금형 제도의 개선 방안에 대해선, 가끔씩(유럽에서 돈 많은 재벌이나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 엄청난 벌금을 내게 됐을 때) 논의가 되곤 하죠. 다만, 그것이 단발적으로 그치고 심도 있게 진행되지 못한 것이 한계였습니다.  

 




우선, 현행 형법상 벌금과 관련된 조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제45조 [벌금] 벌금은 5만원 이상으로 한다. 다만, 감경하는 경우에는 5만원 미만으로 할 수 있다. 


69조 [벌금과 과료] ① 벌금과 과료는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내에 납입하여야 한다. 단, 벌금을 선고할 때에는 동시에 그 금액을 완납할 때까지 노역장에 유치할 것을 명할 수 있다. 


제70조 [노역장유치] 벌금 또는 과료를 선고할 때에는 납입하지 아니하는 경우의 유치기간을 정하여 동시에 선고하여야 한다.





그리고,

현재 벌금형제도의 개선책으로 거론되는 것은 것은 다음과 같은데요. 



1. 총액벌금형제도 → 일수벌금형제도


2. 벌금분납제도와 납부기일연장제도


3. 벌금형의 집행유예제도



현재 대한민국은 총액벌금형제도(總額罰金刑制度)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범죄를 저지른 두 사람, A와 B에게 동일한 벌금형을 선고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벌 회장 A와 제가 같은 벌금을 내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같은 벌금을 내는 것은 평등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개인의 소득 격차를 무시한 채 벌금형의 총액을 정하는 것은 '실질적 평등'에 반하는 것입니다. 가령 벌금 500만 원이 재벌 회장 A와 저에게 선고됐다고 가정해봅시다. 재벌 회장 A에게 500만 원은 아무런 부담이 없는 금액일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 500만 원은 그야말로 아찔한 금액이죠. 같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벌금 500만 원을 가뿐히 납입한 재벌 회장 A와 달리 저는 벌금을 납입하지 못하고, 형법 69조에 따라 노역장에 유치되게 됩니다. 개인의 경제능력에 따른 형벌효과의 불평등이 발생합니다. 아니, 이미 그런 불평등은 사회에 만연하죠. 


유럽의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수벌금형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요. 일수벌금형제도는 개인의 소득상황에 따라 1일당 액수를 정해 이를 일수에 곱해서 벌금을 차등화시키는 제도입니다. 과거 노키아의 부회장이 과속운전으로 11만 6,000유로의 벌금을 냈다거나, 독일의 축구스타 미하엘 발락이 과속운전으로 벌금 1만 유로를 내게 됐던 것은 바로 이들 나라에서 '일수벌금형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계는 이에 대해 대체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개인의 소득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도입이 미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국민건강보험 납부액을 기준으로 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죠. 사실 개인의 소득상황 파악이 어렵다는 이유로 일수벌금형제도 도입을 미루는 건,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 외에도 벌금분납제도와 납부기일연장제도도 개선책으로 논의되고 있는데요. 형법 69조에 따르면, 벌금은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내에 납입하여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겐 30일 내에 그 많은 벌금을 구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벌금을 내기만 하면 된다면, 이를 꼭 30일 내에 내도록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분납'을 통해서 납입하게 하거나, 납부기일을 연장하는 것 정도는 쉽게 허용해 줄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당장 돈을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건, 아무리 봐도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벌금형의 집행유예제도인데요. 징역이나 금고와 같은 중한 형에 대해서도 집행유예가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선고형이죠? 그런데 그보다 경한 형인 벌금형에 대해서는 집행유예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또한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죠? 



위에서 살펴봤다시피, 현행 벌금형 제도는 불합리한 부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민들의 경제적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법이라는 것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도출된 것이고요. 사회는 변화하고 있고, 시민들의 의식도 나날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 흐름에 발맞추어 법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겠죠. 과거 우리 사회가 형식적 평등을 추구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이제는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같은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같은 벌금을 내야지. 벌금을 내라면 당연히 내야지. 빚을 내서라도 내야 하고, 도저히 낼 수 없다면 감옥에 가서 노역을 하는 게 맞는 거지..' 이처럼 너무도 익숙해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불합리한 벌금형 제도의 개선, 우리 함께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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