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대한민국 '의리 열풍' 속 '의리보다 예의!'를 외치다

너의길을가라 2014. 6. 15. 08:30
반응형

 



의리 열풍(熱風).

 

요즘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최고의 키워드는 단연코 '의리'다. tvN 개그프로그램 <코미디 빅리그>에서 개그우먼 이국주는 '의리 사나이' 김보성을 흉내낸 '보성댁'으로 의리 돌풍을 이끌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의리의 나비효과는 그 실제 주인공인 김보성에게 제2의 전성기를 선사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하하는 <선택 2014 특집>에서 김보성을 패러디하며 '으리'를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바야흐로 '의리'는 시대적 흐름이 되어 버렸다. 

 

한때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던 김보성은 다시 진정한 '의리 사나이'로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의리를 강조했던 식혜 CF는 대박이 터졌고, 최근 각종 연예 프로그램과 CF에 섭외되는 등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연예계 스타 그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급기야 KBS <뉴스9>에도 출연했다. 



지난 13일, KBS <뉴스9>는 '의리 열풍…왜?'라는 주제의 리포트에서 김보성에 관해 다루고 인터뷰를 내보냈다. 김보성은 "공익에 대한 의리, 타인을 생각하는 나눔의 의리로 화합과 의리의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의리를 외치고 있다"며 자신의 계속해서 '의리'를 외치는 이유와 그만의 '의리관(!)'을 밝혔다.


한편, 지난 2011년 김보성은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의리 3단계에 대해 설명했는데, "1단계는 개인간의 의리, 2단계는 자기와의 싸움, 3단계는 정의"라는 것이다. 개그우먼 이국주도 자신의 개그로부터 시작한 '의리 열풍'의 원인을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정의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라고 해석하하기도 했다. 


김보성이 말하는 의리의 3단계, 즉 의리의 최종 단계는 정의(正義)라는 설명과 이국주가 말하는 의리가 정의에 대한 목마름을 대체한다는 해석은 일견 타당하게 들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문이 생긴다. 과연 '의리'는 '정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일까? 또, 이처럼 과열된 양상을 보이는 의리 열풍에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의리(義理) :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의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의리는 사전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또 다른 의미로 인식되고 사용된다. 의리 열풍에서의 의리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의리는 '사적 네트워크' 안에서 작동된다. 우리가 평소 의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의리가 있지, 정말 안 도와(해)줄 거야?"

"야, OOO! 진짜 의리 없네. 우리 의리가 이것밖에 안 되냐?"

"에라이, 의리도 없는 놈! 실망이다!"

 

학창시절에 우리가 부르짖던 의리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순수했던 10대의 '의리'는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 죽을 때까지 의리 변치 말자"와 같은 낯뜨거운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있어, 의리는 그저 어려운 부탁을 위한 설득의 도구쯤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의리란 너와 나 사이의 유대감, 돈독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커넥션'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이 '정의(正義)' 혹은 '시비(是非)'와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 부탁이 부정의하고 불합리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의리 없는 놈'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부탁을 도와줘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심지어 비리를 눈감아주거나 부정에 대해 침묵할 때에도 의리는 요긴하게 활용된다. 그리고 '난 의리 있는 놈'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간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또, 의리는 그것을 외치는 자를 맹목적이게 한다.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시켜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 알량한 의리 때문에 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삼켜야만 한다는 것을 '의리에 죽고 사는' 철없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오늘도 그들만의 의리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을 외면할 뿐이다.

 

'사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기능하는 의리가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문제는 '의리'가 공공의 영역에까지 진출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공의 영역도 결국 '사적 네트워크'에 의해 형성되고 운영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이 유별나게 더욱 그럴 뿐이다.



축구 국가 대표팀 선발 문제로 '의리 논란'을 불러 일으킨 홍명보 감독은 지난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0 :4 의 무기력한 참패를 당하면서 체면을 또 다시 구겼다. 지난 2013년 6월 "소속팀에서 얼마나 활약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대표팀 발탁 기준"이라고 밝혔지만, 그의 선택은 '내 새끼 챙기기'로 귀결됐다. 


대표팀 선발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긴 하지만, 자신이 세운 원칙을 저버리며 선발한 선수가 그 이후에 있었던 평가전에서 예상됐던 것처럼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시 논란은 가열됐다. 누리꾼들은 김보성의 사진에 홍명보 감독의 얼굴을 넣으며 패러디를 하기도 하고, '엔트으리'라는 말을 만들어내며 풍자했다. 김보성이 의리의 밝은 면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다면, 홍명보 감독의 경우는 의리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권은 다를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정치권은 그동안 의리가 특화되어 있는 영역이었다고 할 정도로 '의리 천국'이었다. '의리의 화신' 장세동 씨를 거론하는 것은 고리타분할 테니, 최근의 사례들로 글을 꾸며보도록 하자. 7 · 14 새누리당의 전당대회에 당 대표 후보로 출마한 서청원 의원은 10일 '새누리당 변화와 혁신의 길'을 주제로 국회에서 개최한 토론회 인사말의 첫 일성으로 "누가 뭐래도 30년간 정치하면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30년간 정치하면서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서청원 의원은 지난 2002년 16대 대선 과정에서의 '차떼기 사건'과 2008년 18대 총선 때 '친박연대 공천헌금 사건'에서 부정한 정치자금에 연루돼 두 차례나 형사처벌을 받았다. 모든 것을 안고 '감방'에 다녀온 그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의리를 지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난 10월 재보선 화성갑의 전략 공천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의리가 빛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의리'는 '정의'와 맞닿아 있는 것일까?



한편, 서청원 의원의 경쟁자인 김무성 의원도 '의리'를 강조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난 8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의리를 목숨처럼 여기고 정치인생의 신조로 삼았다. 당이 위기에 처할 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새누리당이 위기다" 당 대표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의리를 목숨처럼 여기고, 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던 김무성 의원은 그래서 '찌라시'를 그토록 열심히 읽어댔던 모양이다.


새누리당의 입장에서 볼 때, 서청원 의원과 김무성 의원은 의리를 지킨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좁은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대한민국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혹은 그들이 '그들끼리의' 의리를 지키느라 희생되어야만 했던 가치들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의리'가 특별히 강조되는 '직업군'이 몇 가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조폭 세계이고, 또 하나는 '검사동일체 원칙이 살아 숨쉬는' 검찰이며,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정치다. 필자는 간혹 이들 세 집단이 너무도 유사해서 그들 간의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곤 한다. 집단을 강조하고, 구성원 간의 끈끈한 유대와 동질감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메커니즘이 바로 '의리'다. 바로 변질된 의미의 의리 말이다. 



정의의 실종에 대한 반작용으로 의리가 강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일도 아니고 장려할 만한 일도 아니다. 너도나도 의리를 찾다보면, 오히려 세상의 정의는 처참히 무너질 것이다. 사적인 네트워크가 공적인 영역을 잠식해들어가는 것을 결과는 우리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부정부패와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의리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의리 과잉이었던 셈이다. 


예의(禮儀) : 사회생활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


'의리 열풍' 속에서 필자는 감히 이렇게 외쳐본다. '의리보다 예의.' 의리는 사적 네트워크, 개인적 유대에 기반한 매우 불공평하고 배타적인 것이지만, 예의를 공과 사를 가리지도, 특정인(집단)을 가리지도 않는다. 사실 필자가 예의라고 말하는 그 개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의리'인지도 모르겠다.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덧칠된 의리, 그 변질된 의미 속에서 사회를 좀먹고 있는 의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차라리 의리보다 예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