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대학생들이 국회를 점령했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만의 이야기

너의길을가라 2014. 3. 24.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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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이 국회를 점령했다! 놀라지 마시라.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만에서 벌어진 일이다. 집권당인 국민당이 일방적으로 비준한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약 200명의 대학생(과 활동가)들이 지난 18일부터 입법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대만 경제의 중국 종속화에 대한 우려와 청년의 미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안이 '분노'로 터져나온 것이다.

 



- <연합뉴스>에서 발췌 - 


대만 대학생 '국회 점거사태' 장기화 속 파장 확산 <연합뉴스>


대만에서는 이와 관련한 시위가 잇따르고 있고, 야권(민진단)도 합세해서 서비스무역협정 비준안에 대한 재심의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중국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학생 지도자였던 왕단과 우얼카이시는 농성 현장에 나타나서 "대만에 이런 젊은이들이 있어서 정말 좋다"며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쯤되면 비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뭐하고 있는가?'라는 불만이 제기될 법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들은 그러한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 그 내용을 확인해보자. 



대만의 대학생들은 '국회를 점령'했고,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고작(?) '대자보를 붙였'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릴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첫 번째는 상황의 차이다. 두 번째는 임계점의 차이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전 세계적인 공통점이다. 호황을 누리고 있는 국가는 없다. 다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만의 상황과 대한민국의 상황은 분명 차이가 있다.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혹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있어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단편적인 비교는 어렵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결국 상황에 대한 비교보다는 '임계점의 차이'로 설명하는 쪽이 나아보인다. 아무리 버티거나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한계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굳이 세계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된 바 있다. 후삼국의 혼란기, 고려의 수많은 민란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임술농민봉기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번졌던 민란들은 참다참다 터져나온 절규였다. 


임계점으로 설명을 한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은 여전히 견딜 만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아니, 대한민국 청년들의 임계점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내심(혹은 참을성)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훈련'되어 있는 것이다. 엄밀히는 '길들여'졌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민주화 시대를 겪은 '선배'들은 청년들에게 '나약함'을 질타하며 불평을 하지만, 그런 '후배'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아닌가? 지금의 '체제(시스템)'이 아닌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현격한 차이가 있다. 불과 20~30년 전이라고 하지만 당시와 2014년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변했다. 체제는 갈수록 공고해졌다. 그 어느 시대와 비교해도 지금보다 소비적인 시대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있다고 한편에서는 소리치지만, 지금보다 더 영약한 자본주의 체제는 없었다. 그 어느 시대가 지금보다 개인주의적이던가?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는 완벽히 파편화됐고, 완벽히 소비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 도심에 나가보라. 거리를 가득 메운 유혹들을 보라. 욕망을 부추기는 저 수많은 상품들을 보라. 굳이 도심이 아니라도, TV와 인터넷만으로도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들은 우리를 끔찍한 삶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잠시나마 우리를 구원한다. 또, 희생당하기 위해, 대중들의 분노를 받아내기 위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연예인들을 보라. 이보다 좋은 안주거리가 있던가?


대만의 대학생들이 국회를 점령했다는 것에 '박수'를 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자녀가 대한민국의 국회를 점령하러 가겠다고 해도 '박수'를 칠 것인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이 달린 문제이니까. 체제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마 이렇게 말리지 않을까? "얘야, 너는 그냥 신경쓰지 말고, 공부해라"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착해서 고작 '대자보'를 붙일 뿐이라고 자조하지 말길 바란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의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 정도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청년들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주체는 '사회'이고, 지금의 '기성 세대'이다. 그렇게 '교육'시켰고, 그렇게 '주입'시켰다. 나서지 말라고. 덤비지 말라고. 까불지 말라고.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각자 자신의 가정(家庭)을 떠올려보자. 만약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가정(假定)해보자. 당신은 어느 쪽인가? 자녀의 행동을 용납하고 격려하는 쪽인가? 아니면 빠르게 억압하고 진압하는 쪽인가? '우리 가정은 문제가 없어. 내가 얼마나 민주적으로,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는데'와 같은 뻔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건 오히려 자녀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광고하는 꼴이니까. 



작년(2013년)에 타계한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고 강변했다. 분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그가 분모'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에서 "분노 자체만으로는 세상의 이해를 도모할 수 없다", "분노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일 수도 있다"며 분노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부연 설명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분노하라는 말보다 미래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더 근본적인 메시지는 용기와 회복탄력성이다"는 것이리라. 


지금의 청년 세대를 비난하는 기성 세대들의 답답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가령, 민주화 운동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 청년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가 마뜩지 않을 수도 있다. '뒤집어 엎자'고 주장하는 그가 시대착오적으로 외면당하는 상황이 불쾌할 것이다. 하지만 그 책임이 청년 세대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가장 '첨단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파편화'된 개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이 극도로 현란하고 예민한 '체제'를 살아가고 있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에게 '뭉쳐야 산다'는 말은 체감할 수 없는, 체화되지 않은 뜬구름잡는 소리와 같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을 몸에 익힌 세대다. 내 앞의 누군가를 제쳐야만 내가 산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 왔다. 이제 와서 '왜 분노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건 난센스다. 우리는 그렇게 가르쳐왔다. '쟤가 분노할 때, 넌 부지런히 공부해"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건 아니다. 홀로 (자의든 타의든 간에) 고립된 우리도 분노한다. 다만, '사소한 것'에 대해.. 왜 '사소한 것'에 대해서만 분노하느냐고? 그에 대해선 이미 진중권이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설명했다.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가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학생들을 탓해 무엇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맞고 처연히 서 있는 그들의 비루한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인 것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노하지 않는' 혹은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청년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회복탄련성을 회복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비루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우리 자신부터 변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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