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뜯어먹는 소리

거대한 무언가를 마주한 당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너의길을가라 2013. 9. 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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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말이고 하니까, 느긋하게 그림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우선, 그림부터 봐야겠죠? 




-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94.8x74.8cm, 캔버스에 유채, 1818년경,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 



분위기를 좀 바꿔볼 겸 새로운 프로필 사진을 고르다가 이 그림을 선택했습니다. (아, 이전의 프로필 사진은 존 콜리어의 '고디바 부인'이라는 그림이었죠. 다들 기억하고 계시죠?)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라는 작품입니다. 


사실 저도 그림에 대해 잘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보다 마음껏 혹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그림을 대할 때, 지나치게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쫄' 필요가 없잖아요? 물론 손철주의『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책 제목처럼 알아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건 맞습니다. 또, 파트릭 데 링크의 『세계 명화 속 숨은 그림 읽기』처럼 '보는' 것은 기본이고, 그것을 넘어서 '읽기'가 강조되기도 하죠. 




-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호라티우스의 맹세, 캔버스에 유채, 1785년, 루브르 박물관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그림 중에는 고대 그리스 ·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작품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겠죠. 신화의 내용을 알수록 훨씬 더 재밌고 즐거운 감상이 될 겁니다. 바로크 시대로 접어들면, '역사화'가 대유행을 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시대, 신고전주의의 시대가 열린 것이죠. 호리티우스의 맹세라든지,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등의 작품들은 로마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으면 보다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화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그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수월합니다. 가령, 반 고흐라고 하는 화가의 삶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가 그렸던 그림들이 훨씬 더 마음에 와닿겠죠? '아는 만큼 보인다' 라든지, '그림 읽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굳이 반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지식'을 통해 그림에 접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런 말도 좋겠네요. '꽂혔다.' 저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미술관에 갔을 때 한눈에 반하는 그림들이 있다고 하죠? 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저릿저릿한 경험,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서는 경험 혹은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거나 가슴이 먹먹해서 발걸음을 뗄 수 없는 그런 경험들 말이죠. 그럴 때는 화가가 누군지, 언제 그려졌는지, 무엇으로 그렸는지, 어떤 미술 기법이 사용됐는지..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낌', '그림과 나의 만남'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죠.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그림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간단한 그림이죠? 그림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거센 파도처럼 격렬히 요동치는 듯한 안개로 뒤덮인 바다를 홀로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뿐입니다. 강인하고 의지적인 인간의 모습이 언뜻 보이다가도, 외롭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도 보입니다. 어쩌면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한번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자연 앞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떠올려 볼까요? 어떨까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솟구쳐 오르나요? 아니면 그 장엄한 모습 앞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없이 작음을 받아들이게 되나요? 서양인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중의 다수는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그들은 미지의 바다를 정복했습니다. 이제 바다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황금의 땅으로 가는 길이 되었고, 그들은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뻗어나갔죠. 물론 자연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를 강조하고,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진 않습니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위험하죠. 하지만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라고 여겨집니다. 가령, 동양에는 이런 그림이 있잖아요? 




- 강희안(1417-1464), 15.7×23.4㎝.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아주 유명한 그림이죠? 교과서에도 있는 그림,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입니다. 그림 속의 저 사람, 참 평온해 보이죠? 걱정 근심 하나 없는 표정입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의 남자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자연이 '대립'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 혹은 '동화'의 대상입니다.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 자연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꿈꾸며, 안분지족(安貧樂道)하고 단사표음(簞食瓢飮)하는 삶을 꿈꿨죠.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동양에서 탐욕스러운 인간들,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들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시대적으로 보자면,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가 그려진 건 19세기 초입니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광풍이 온 유럽을 뒤덮었던 시기죠. 프리드리히가 그린 '안개 바다'는 단지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거대한 변화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근대'라고 하는 시대적 변화, 그 거대한 조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윌리엄 터너, 비·증기·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

 91x121.8cm, 캔버스에 유채, 1844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영국의 윌리엄 터너는 '비·증기·속도'라는 작품을 남겼는데요. '빛의 표현'이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 작품에서 터너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에게 '근대'는 어떤 느낌이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희미한 어떤 것, 불확실한 어떤 것, 하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는 확실한 그 무엇..! 정도 아닐까요? 서양인들에게도 '근대'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미지의 것, 두려운 무언가였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에서 남자의 뒷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죠. 다만, 상상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림에서 느낀 '감정'들을 토대로 유추해 볼 뿐이죠. 그건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제 생각이요? 글쎄요. 왠지 다가오는 기차를 바라보던 터너의 표정과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남자의 표정이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흠.. 왠지 그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요?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흐릿하지만 분명한 '변화'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오늘의 줏대없는 그림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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