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뜯어먹는 소리

충격과 공포, '광기'를 그린 그림들.. 세상을 돌아보다

너의길을가라 2013. 9. 2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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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狂氣) [광끼]

[명사]

1. 미친 듯한 기미.

2. 미친 듯이 날뛰는 기질을 속되기 이르는 말.


'광기(狂氣)'라는 단어와 함께 연상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일랴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입니다. 러시아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 그림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이 주는 강렬한 힘 때문이겠죠? 



- 일랴 레핀,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885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는 바로 러시아의 첫 왕조인 류리크 왕조의 이반 뇌제입니다. 그리고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한 남자는 이반 뇌제의 아들인 이반 황태자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고, 아들은 그 순간에도 원망이 아닌 안타까움과 동정의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아들을 죽이고 만 이반 뇌제(雷帝)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반 뇌제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고 합니다. 대귀족들의 궁정 혁명과 전횡을 겪으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죠? 그래서 일까요? 주위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항상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며 살았다고 합니다. 성품도 포악하고 잔인해졌고요. 한때는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개혁을 단행했던 총기있는 군주였던 이반 뇌제, 결국 그는 궁중의 암투와 음모로 인해 의심 많고 괴팍한 광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들을 죽인 왕'이라는 테마는 우리 역사에서도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선의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여전히 논란 속에 있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여버린 것은 논란과는 무관한 명백한 역사입니다. 권력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죠. 하지만 이반 뇌제와 이반 황태자의 경우에는 '권력 투쟁'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이반 뇌제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굳게 믿었으니까요. 그렇게 때문일까요? 거의 유일하게 신뢰했던 사람을 죽여버린 그림 속 이반 뇌제의 모습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이반 뇌제가 아들의 처소에 들렀고 마침 며느리인 황태자비와 만나게 됐습니다. 이반 뇌제의 눈에는 황태자비가 입은 옷이 음란하게(혹은 정숙하지 않게) 보였다는 겁니다. 화가 난 이반 뇌제는 임신한 상태였던 황태자비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황태자가 현장에 도착했고, 그 때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이반 뇌제는 쇠지팡이로 자신의 아들의 관자놀이를 내려쳤습니다. 그리고 다음 일은 그림의 저 장면과 같습니다. 쇠지팡이는 바닥에 나뒹굴고, 카페트는 당시의 광기어린 분위기를 전달하듯 구겨져 있죠.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셨나요? 지난 번에 글을 쓰면서 살짝 삽입했던 그림이기도 한데요. 그렇습니다. 바로, 프란시스코 고야의 「제 아이를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입니다. 





- 프란시스코 고야, 제 아이를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146×83cm, 캔버스에 유채, 1820-1824 경 - 



일랴 레핀의 그림 못지 않게 '광기'에 가득차 있는 그림입니다. 한마디로 충격과 공포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앞서 살펴본 이반 뇌제의 경우와는 상황이 상당히 다릅니다. 고야의 그림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집어삼키고 있는 거인은 사투르누스입니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신이죠. 그리스 신화로 치면, 크로노스입니다. 사투르누스는 왜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고 있는 걸까요? 그에게는 원죄가 있습니다.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살해한 전력(!)이 있는데요. 그때,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너 역시 네 자신의 손에 죽을 거야' 라는 끔찍한 저주 말이죠.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결국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아들인 포세이돈과 하데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자녀들을 차례차례 집어삼키고 맙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아주 끔찍한 일이죠. 


고야는 이 그림을 통해 신화를 재현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성의 타락, 전쟁의 폭력성, 세대 간의 갈등 등을 그려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혹은 그림을 그리던 당시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고야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려냈다는 분석도 있죠. 이반 뇌제와 사투르누스는 모두 자신의 아들을 죽였지만, 그 표정은 사뭇 다릅니다. 순간의 분노와 흥분 때문에 아들을 죽이고 난 이반 뇌제가 충격과 공포, 짙은 후회를 느끼고 있는 반면, 사투르누스의 눈에는 오로지 광기만이 가득합니다. 과실범과 확신범의 차이 정도일까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위의 그림 못지 않게 '광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이 순간적인 분노를 컨트롤하지 못해 생긴 것이든, 분명한 의도를 갖고 행한 것이든..!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 중의 하나인 인천 모자(母子) 살인사건도 마찬가지죠. (아직 사건의 실체가 100% 드러나진 않았지만) 돈 문제로 어머니와 형을 살해하고, 그 시신들을 땅에 묻고 태연하게 지냈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죠. 형의 경우에는 토막을 내기까지 했다죠. 그 외에도 참 무섭고도 잔인한,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광기'로 가득차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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