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개인의 노력이라는 희망고문, 1대 99사회가 유지되는 비밀

너의길을가라 2014. 3. 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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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한때, '20 대 80 사회'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 시절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제시한 개념인데, 그는 인구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이것이 바로 '파레토의 법칙'이다. 물론 이제 '파레토의 법칙'은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더 이상 '파레토의 법칙'을 언급하거나 인용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은 없다. 


기억하는가? 지난 2011년 11월, 뉴욕의 월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외쳐졌다. "우리는 소외받은 99%, 탐욕의 1%인 월가를 점령하라" 어느덧 세계는 '20 대 80 사회'를 넘어 '1 대 99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실제로 2012년 미국 상위 1%의 연간 가계소 소득 비율은 전체 가계 소득의 22.2%를 차지했다. 상위 1%의 소득은 20% 가까이 증가한 반면, 하위 99%의 소득은 고작 1% 증가하는 데 그쳤다. 빈부격차는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 <국민일보>에서 발췌 - 



이는 단지 미국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유엔대학 세계개발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을 기준으로 최상위 부자 1%가 전 세계 자산의 50%를 소유하고 있고, 상위 10%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8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처참하지만 계속하겠다. 하위 50%는 전 세계 부의 달랑 1%만만 차지하고 있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의 총합과 같다고 한다. 


이제 세계는 '1 대 99 사회'라는 말로도 담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0.1 대 99.9 사회'로의 진입이 가속화되고 있고, 브레이크 따위는 없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대니얼 돌링의 보다 적나라한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자. 


세계 인구 가운데 가장 빈곤한 10%의 사람들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다. 가장 부유한 10%에 속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을 겪어본 일이 없다. 최하위 10%는 자녀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상위 10%는 자녀들이 이른바 '엇비슷한 친구들'이나 '더 나은 친구들'과만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많은 수업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최하위 10%는 거의 언제나 사회보장도 없고 실업수당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반면, 최상위 10%는 그런 수당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최하위 10%는 도시에서 날품팔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농촌에 사는 농부들이다. 그러나 상위 10%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상위 1%에 속하는 거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이 아니라 봉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대니얼 돌링, 셰필드대학교 인류지리학 교수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당신의 주사위를 확인하라!


앞선 글에서도 인용했지만, 대한민국도 이러한 '세계적 유행'에 조응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소득 불평등 지수는 OECD 회원국 중 9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위 10% 가구의 평균 소득은 하위 10% 가구의 10.5배에 달한다. 대한민국의 빈곤률은 16.5%로 OECD 회원국 가운데 6번째로 높았다. 소득의 차이는 곧 교육의 차이로 이어졌다. 고소득층과 저소등층의 교육비 지출액은 6.58배에 달했다. 소득 5분위(상위 20%) 가구는 월 평균 50만 4,300원을 지출한 반면, 소득 1분위(하위20%)는 7만 6,600원에 불과했다. 이러한 교육의 차이는 다시 소득의 차이로 이어진다. 결국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표들을 살펴보는 것보다 훨씬 더 슬픈 것은 바로 사람들의 인식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2013년 12월 발표한 '근로 및 사회정책에 대한 국민의식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들은 빈곤 원인을 주로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세계일보>에서 발췌 - 


빈곤 원인으로 언급된 것들 중에서 개인의 영역은 빨간색으로 사회의 영역은 파란색으로 표시를 해봤다. 단순 개수만 따져도 개인의 영역은 7개였고, 사회의 영역은 4개에 불과했다. 더구나 개인적인 문제들로 지적된 것들이 상위에 랭크됐다. 사람들은 빈곤의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귀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 부족, 음주와 도박 등 자기조절 실패, 개인의 돈 관리능력 부족, 질병과 신체적 장애, 개인적인 불행과 불운, 학력수준 미흡, 개인의 능력부족.. 사람들이 거기서 거기인 '자기계발서'를 읽고, 소위 '멘토'들을 찾아 나서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을 해보자. 당신이 24시간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미친듯이 일을 하면 상위 1%의 삶에 진입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럴 경우, 당신이 과로사로 세상을 갑자기 떠날 확률은 99%일 것이다. 물론 개인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특정한 개인이 유전적으로 훌륭한 기질을 이어받았고, 그것이 엄청난 노력과 결부되면서 놀랄 만한 성과를 거뒀다고 해보자. 그건 그야말로 '로또 맞을 확률'에 불과한 일이다. 그것을 일반화시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지난 글에서 필자는 '나에게 주어진 주사위를 확인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사회는 11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지만, 정작 나에게 주어진 주사위 2개의 6면이 모두 1로 이뤄진 것이라면, 평생토록 주사위를 던져본들 11이라는 숫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 혹, 사회가 그런 구조적인 모순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멈춰서서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리에겐 잠시라도 멈춰서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빈곤의 원인이 개인의 탓, 다시 말해서 나의 문제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멈춰선다고? 그랬다가 내 뒤에 있는 애가 날 추월하면 어떡해? 쟤가 한 번이라도 더 주사위를 던져서 11을 맞춰버리면 어떡해?' 라는 불안과 공포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사위를 던질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전근대 사회에는 '계급'이 사람들의 생각을 가로막았었다. '그들과 우리는 신분이 달라. 그들과 우리는 피가 달라. 귀족들이 부유한 건 당연한 것이고, 우리가 가난한 것도 마찬가지야' 전근대 사회가 이와 같은 절대적 무력감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상대적 무력감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 바로 '개인의 노력'이라는 '희망고문' 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당연한 것이고, 경쟁은 필수적인 것이다. 부자는 노력의 대가를 취하는 것이고, 가난은 부족한 능력과 노력 탓이다'는 생각은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에 그것이 재능과 능력이라는 선천적인 것들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노력'이라는 후천적인 요인의 탓인 것마냥 진화했다. 정말 그럴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사회적 불평등'은 승리한 것일까? 

개인의 재능과 능력들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수백 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이 무리 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를 제어하는 매우 효과적인 브레이크의 역할도 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불평등의 '부자연스러운' (실제로는 '지나친') 정도, 즉 부정의한 정도를 탐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제공했고 또한 그것의 수정을 요구했다. 사회적('복지') 국가의 전성기에 볼 수 있었듯이, 때로 그것은 사회적 위계의 상층과 하층 간의 간극을 얼마나 좁히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움'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고도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불평등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20 대 80 사회'가 '1 대 99 사회'가 되고, 심지어 '0.1 대 99.9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모순'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1 대 99 사회가 된 것이 99의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인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그럼에도 '구조적 모순'이라는 진실을 지적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아니, 일종의 '패배주의'처럼 여겨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더 이상 1%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99%들이 자발적으로 구조적 모순을 옹호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려세우고 있다. 어쩌면 이제 사람들에겐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보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다. 구조를 바꿀 힘은 없지만, 잠 한 시간을 줄이는 정도의 통제는 가능하지 않은가? 


'노력해도 안 되잖아!'라는 한탄에 구조화된 세상은 이렇게 답한다. '더 노력 했어야지~!' 정말 그런 걸까? 영화 <설국열차>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지만, 밖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어!"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상상력이 남아 있던가? 차라리 내 앞에 한 명이라도 제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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