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신의 한수>는 바둑 영화? 아니, 바둑을 빙자한 조폭 영화

너의길을가라 2014. 7. 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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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42.5cm 세로 45.5cm의 나무판 위 각각 19줄, 361점에서 펼쳐지는 바둑 한 판에는 흔히 인생이 담겨 있다고 한다. 장기와 체스를 고차원적인 머리 싸움이라고 하지만, 바둑은 그 수(手)의 가짓수가 여타 보드게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바둑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두뇌 게임이라고 할까?


지난 1997년 5월,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러시아의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던 것(전체 승부에서는 카스파로프가 3승 2무 1패로 승리)을 시작으로 지난 2005년에는 아랍에미리트의 슈퍼컴 3대가 인간을 꺾으면서 이제 더 이상 체스에서 인간의 우위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바둑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현재까지 바둑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긴 적이 없다. 이러한 바둑에서의 인간의 우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바둑은 복잡하고도 오묘한 게임이다.



최근 '바둑'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가 연달아 개봉을 했다. 지난 6월 개봉 했던 故 조세래 감독의 <스톤>은 누적 관객 수 14,241명을 기록했다. 비록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지만, 관객들의 평가는 호평(好評)이 주를 이뤘다. 그 뒤를 이어 조범구 감독의 <신의 한 수>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스톤>에 비해 덩치가 훨씬 큰 상업영화인 <신의 한 수>는 정우성을 앞세워 일단 흥행 몰이에 성공했다. 지난 4일에는 <트랜스포머>를 누르고 박스오프시 1위에 올랐고, 5일까지 누적 관객 수 825,253명을 기록했다. (5일에는 다시 2위로 내려앉았다)


월간 바둑은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가 반가웠던지, <신의 한 수>에서 맹인바둑의 고수 주님을 연기했던 안성기를 커버 모델로 선정하고 인터뷰도 실었다. 《월간 바둑》의 입장에서는 바둑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만, 실제로 <신의 한 수>가 바둑의 중흥기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스톤>과 <신의 한 수>에는 모두 '바둑'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영화를 '바둑'을 제대로 다룬 영화라고 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수부터 다시 한 번 두고 싶다…"


<스톤>은 '내기 바둑'을 전전하지만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 아마추어 바둑 기사 민수(조동인)와 은퇴를 앞두고 있는 조직 폭력배 남해(김뢰하)의 만남을 통해 바둑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스톤>은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 로카르노 영화제 신인감독 경쟁 부문 등에 초청을 받았을 만큼 국내외로 인정을 받았던 작품이다. 


<신의 한 수>에 비해 <스톤>은 바둑을 영화 속 스토리 내에 잘 녹여낸 편이다. 한 판의 바둑이 끝나면 '계가(計家)'가 시작되고, 그 이후에는 '복기'가 이어진다. 복기 과정을 통해 승부처를 되짚어보고 패착이 된 수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한다. <스톤>은 바둑의 '복기'를 인생과 연결 지어서 표현해냈다. 조직 폭력배로서의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후회를 갖고 있는 남해는 민수가 실패의 길을 걷지 않도록 돕는다. 민수는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자신의 인생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러나 <스톤>이 영화적 소재로 활용하는 '바둑'은 '내기바둑'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급기야 바둑 자체가 '조폭 영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물론 <신의 한 수>에 비하면 <스톤>은 훨씬 훌륭한 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신의 한 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 세상이 고수에게는 놀이터요, 하수에게는 생지옥이 아닌가?"


'바둑'은 '내기 바둑'과 '조폭'과 연결짓지 않으면 영화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일까? <스톤>에서 영화를 인생에 빗대는 노력을 했던 것과 달리 <신의 한 수>는 왜 굳이 '바둑'을 소재로 했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타짜>가 고스톱의 오묘한 세계를 관객들에게 소개해졌다면, <신의 한 수>는 바둑을 '내기바둑'과 '복수'의 영역에 가둬버린다. 온통 칼부림과 피칠갑이 난무하는 이 영화를 보고 바둑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나오기는 할까? 


조범구 감독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적인 두뇌 게임 바둑과 동적인 육체 액션이 함께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정신적인 영역에서 죽고 사는 것과 육체의 액션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승부의 본질에선 같다"고 말했다. 정적인 두뇌게임인 바둑과 육체 액션이 지배하는 조폭들의 세계를 대비시키고자 했던 감독의 애초의 의도 자체는 신선하고 훌륭하다.



그러한 기획 의도처럼 정적인 바둑과 동적인 육체 액션(조폭 세계)을 대비시켜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한 수>에서는 그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육체의 과잉이 결국 바둑을 집어 삼켜 버렸고, 급기야 <신의 한 수>는 바둑을 어설프게 곁들인 조폭 영화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한껏 잔인하고 잔혹한 조폭 영화 말이다.


'내기 바둑' 때문에 형을 잃은 것에 대한 태석(정우성)의 복수가 <신의 한 수>의 주된 이야기인데, 포커스 자체가 지나치게 '복수'에 맞춰져 있다보니 태석의 내면적 감정 변화와 같은 부분은 완전히 생략됐다. 이는 <감시자들>에서 정우성이 연기했던 킬러 제임스의 경우와 유사하다. 두 작품 모두 정우성의 외면적 특징(조각 같은 얼굴과 완벽에 가까운 비율 등)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캐릭터의 개연성은 잃고 그저 '폼'만 남았다. 



이렇듯 태석이 단지 '복수 기계'가 돼버리면서 영화는 지나치게 잔혹물이 되어 버렸다. 청소년관람불가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잔인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신의 한 수>는 바둑이 '인생을 건 고독한 한 판 승부'라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바둑이 초인적인 인내심과 철저한 수읽기를 통해 이뤄지는 냉철한 게임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됐다. 게다가 뜬금없는 태석과 배꼽(이시영)의 러브 라인은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패착이다. 


<스톤>과 <신의 한 수>의 또 다른 한계는 바둑에 대한 관객의 이해도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바둑이라는 게임과 그 규칙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2시간 안에 모든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영화적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불성실했다는 인상을 준다. 이미 <타짜>에서 영화의 줄거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게임의 룰을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증명이 됐던 것 아닌가? 결국 바둑을 소재로 했으면서도, 바둑을 제대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고작 '바둑의 용어'들만 빌려다 쓴 수준에 그친 꼴이 된 점은 너무도 아쉬운 점이다. 



바둑을 수담(手談)이라고도 한다. 내가 놓은 한 수 한 수는 곧 내 뜻이고 말이 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 윤태호, 『미생』-


웹툰 작가 윤태호의 《미생》이 직장(사회) 생활과 바둑을 절묘하게 연결시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것을 보면, 역시 바둑이라고 하는 게임의 효용 가치는 여전히 크다고 생각한다. 얼마든지 바둑도 살리고 스토리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많다. 미생》의 경우에는 '웹툰'이라고 하는 매체의 특성상 바둑을 쉽게 소개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는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케이블채널 tvN에서 미생》을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현재 배우 이성민은 종합무역상사의 베테랑 과장 역으로 출연이 확정됐고, 주인공인 장그래 역에는 임시완이 유력하다고 한다. 장그래의 직장 동기인 안영이 역에는 강소라가 제안을 받았다. 과연 드라마 <미생>은 원작이 지켜냈던 바둑의 분위기를 지켜낼 수 있을까? 영화에 비해 호흡이 긴 드라마의 특성을 십분 살려서 바둑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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