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한 평짜리 무료 법률 상담소, 잘 듣는 변호사가 있습니다(<사랑 없이 우리가 법을 말할 수 있을까>)

너의길을가라 2025. 4. 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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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직종들은 대개 특정한 이미지를 갖게 되는데, 변호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알게 모르게 형성되고, TV 시사 프로그램 등에서 발견되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상은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들은 법정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TV에서 법적 지식을 쉴새 없이 떠들어댄다. 저마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 '말의 인플레'가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여기 '듣는' 변호사가 있다. 구청 화장실 앞 복도에 세워진 칸막이 옆 한 평의 공간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변호사,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 고령층, 외국인 근로자 등 취약 계층을 위해 무료 법률 상담을 하는 변호사, 끝내 '사랑' 없이는 법을 말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변호사 말이다. <사랑 없이 우리가 법을 말할 수 있을까>(부키)의 저자 천수이 변호사이다.

"다양한 사연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계절이 있고, 아마도 의도치 않게 계속 겨울이 반복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다시 봄이 찾아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역할이다. 지금 그들의 계절이 나의 계절과 다르더라도, 그들의 계절을 한 번 더 이해해 보기로 한다."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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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울 신림동의 어느 달동네에서 사회 운동에 헌신한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정부 지원 없이 운영하다보니 삶은 척박했다. 척박한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 컸던 저자의 어린 시절은 혹독하리만치 가난했다. 그는 인생 첫 기억이 "구석구석 가난이 깃든 낡은 판잣집 마루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일"이라고 고백한다.

만 원짜리 장난감이 갖고 싶었던 일곱 살의 저자는 삼촌에게 선물받고 한없이 기뻤지만, 어느날 엄마로부터 문방구에 가서 환불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네가 잠시 갖고 놀다 버릴 장난감 살 돈 만 원이면 갱지가 이만큼이고, 이 갱지에 공부방 아이들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꿈을 키울 수 있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서운했을까. 하지만 저자는 정해진 길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역 아동 센터를 운영하는 엄마와 지역 신문사와 야학을 이끌어 온 아빠의 끈기와 사람에 대한 애정, 어려운 형편에도 딸에게 책을 사서 읽혔던 사랑은 저자를 빨리 어른이 되게 했고, 남들을 좀 더 헤아리는 사람으로 자라게 만들었다. "두 분의 삶을 온전히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내 몫의 사랑이라고 믿었다."는 저자의 단단함이 감동적이다.

저자의 삶은 그의 말마따나 "다 정해져 있었"던 걸까. 가난이 싫어서 변호사가 된 그의 첫 직장이 취약 계층을 위한 무료 법률 상담이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첫 출근 당시에는 "내가 이런 화장실 앞 복도에 앉아 있으려고 치열한 서류 심사와 면접을 통과한 것이었나."며 참담한 심정에 내몰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라며 한탄해본다.

하지만 2년 동안 일하며 2000여 명의 의뢰인을 만난 저자는 "장소나 복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 인간으로서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난생처음 듣는 애기들", "법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그냥 넋두리인지 모를 사연들"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함께 맞장구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갔다고 말한다.

<사랑 없이 우리가 법을 말할 수 있을까>에는 저자가 2016년부터 2년간 접했던 다양하고 기구한 사례들과 그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잘 녹아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억울한 사람, 화난 사람, 답답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 매듭을 착실히 풀어내는 장면들을 통해 저자는 사람들에게 절실했던 건 결국 위로와 사랑이었고, 이는 '듣기'를 통해 다다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추천사를 쓴 <해방의 밤>의 저자 은유는 "직업과 명함이 무엇인지보다 매일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한 사람을 더 잘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또,  "천수이 변호사는 우리 사회 주변부의 부스러기 같은 이야기를 특유의 공감력으로 빨아들이고 복원해 낸다"고 설명한다. 차가운 법이 가닿지 못한 빈틈을 사람의 온기로 채워넣는 저자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잘 듣는 사람'이다.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 그 어떤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무엇이든 잘 들어 주는 변호사, 천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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