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 법의학자 이호의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너의길을가라 2025. 3. 3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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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의사들이 사람을 살리려 하지만, 저는 이미 사망한 사람을 통해 놓친 것이 무엇일까를 되짚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 7)

30여 년 간 법의학자로 일하며 약 4천여 건의 부검을 진행한 법의학자 이호 교수가 의대 본과 4학년 졸업을 앞두고 병리학 교수 앞에서 면접을 볼 때 했던 말이다. "참,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웃음과 돌아온 대답이었다. 법의학자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이호 교수가 평생 안고 사는 화두가 됐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주검을 대하며, 매일마다 맞닥뜨려야 했던 죽음을 되짚으며 이호 교수는 과연 무엇을 발견했을까. 법의학을 결심했을 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웅진지식하우스)은 저자인 법의학자 이호 교수가 그동안 정면으로 대했던 여러 죽음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들려주는 내용의 책이다.

한강 작가가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자가 산자를 구한다"고 말했듯, 저자도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고 언급한다. 저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 침상에 누운 그들을 내려다봐줄 의사가 되어주는 것, 법정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억울함을 밝혀줄 증언자가 되는 것"이 법의학자의 역할이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억울한 망자들의 마지막 대변인"을 자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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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는 부검을 통해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듣게 된다. 고인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떠나는 길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그를 대신해 변호를 해주기도 한다." (p. 22)

1998년 국과수연구원에서 법의학자로 활동을 시작한 저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사건',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 현장에서 수습을 맡았다. 또, '삼례 나라슈퍼 사건', '약촌오거리 사건' 등 수사기관의 잘못으로 애꿎은 시민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사건에서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그런가 하면 의료 과실 혹은 의료 사고로 인해 고통받은 망자의 유가족들을 만나 그 마음을 헤아리기도 했다. 저자는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환자와 병원을 중재하는" 진정한 의미의 명의였다. 그건 환자의 가족이나 유가족을 만나 소통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현장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데 열중했던 저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이걸 끌어나갈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다." (p. 108)

책의 1부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에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다양한 고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부모의 학대로 사망한 어린아이, 부부싸움 끝에 살해당한 아내, 의료 과실로 생명을 잃은 고등학생 등처럼 자신의 죽음에 어떤 항변도 할 수 없는 망자들 말이다. 만약 저자가 그 주검들을 투명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그 죽음에들 편견을 가졌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진실이라 아찔하다.

저자는 2부 '삶은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에서 죽음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럴 때 삶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드렸던 비극적 사건들을 되짚으며, 문책과 처벌에 매몰되지 말고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는 태도, 너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품어내는 문화가 절실하다."고 강변한다.

3부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죽음'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서 불운을 겪은 이들에게 공감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당부하고, 같은 세상을 사는 공동체로서 연대의식을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죽음을 사유하며 발견한 삶의 가치이다. 매일 죽음을 보다보면 오히려 살아 있는 게 비정상처럼 느껴질 수 있을 텐데, 그 허무를 넘어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은 저자의 깊이에 감탄하게 된다.

때로는 살아간다는 게 막막할 때가 있다.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고, 나를 둘러싼 상황이나 관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막다른 길에 도달한 듯 암담한 상황에 처했다는 두려움에 잠식되기도 한다. 예기치 않게 닥쳐오는 상실과 죽음의 공포와 불안이 온몸과 정신을 죄어오는 순간이 있다. 저자는 "그럴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무심코 흘려보내는 일상이 소중한 이유, 당연한 듯 존재하는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삶이 아닌 죽음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는 인간의 관계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삶은 당연하지 않고, 이 순간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들이 기적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사유한 결과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연결된다. 수많은 망자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남겨진 유가족과의 아픔과 슬픔에 마음 한 켠을 내주며 살아온, 누구보다 죽음 언저리에서 치열하게 사색했던 저자의 통찰이 묵직하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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