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남극에 간 최초의 한국 소설가는 한 달 동안 무엇을 얻었을까?(김금희, '나의 폴라 일지')

너의길을가라 2025. 2. 2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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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존재에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능력이라면 그것이 자연을 향할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다워지고 대범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p. 99)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품은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버킷리스트에 넣어두고 죽기 전에 꼭 가보겠노라 오매불망 염원하거나, 그 정도로 결의에 차지 않더라도 오랜 시간 꿈꿔 오던 공간 말이다. 『나의 폴라 일지』를 쓴 소설가 김금희에게 그 곳은 세상의 끝 '남극'이었다. 남극이라니! 살벌한 추위 속에 영구동토층이 형성된, 유빙이 해안으로 밀려오는, 얼음 땅 위에 펭귄들이 가득한 남극이라니!

저자는 작가가 되기 전부터 남극에 가는 순간을 꿈꿔왔다고 한다. 그에게 남극은 어떤 곳일까. "인간과 그것이 만들어낸 문명이 없는 자연" 그러니까 세상의 인위적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저자는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관광'이 아니라 '머무름'을 통해 "인간종(種)으로서 작고 단순하고 겸손해지는 과정을 겪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극이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인가. 저자 역시 여러 경로를 통해 수 차례 문을 두드렸으나 매번 실패의 쓴맛을 봐야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끝내 길은 열리는 법. 마침내 '한겨레'의 특별 기자 자격을 부여받은 저자는 극지연구소인 세종연구소 한 달 가량 체류할 수 있는 특파원으로 위촉된 것이다. 저자가 얼마나 기쁘고 벅찼을지 짐작이 되는가.

이제 남극으로 가는 걸까. 그럴 리가! 아직 준비 과정이 남았다. 저자는 여름 동안 연구 대원이 받는 훈련에 준하는 생존 및 안전 교육 과정을 수료해야 했다. 그만큼 남극은 인간이 살아가기에 극악의 환경이고, 불의의 상황에 대처하는 트레이닝은 필수적이다. 의무적으로 교육에 임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저자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성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대비는 무엇에 기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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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람들이 펭귄을 좋아하는 건 용감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으르렁거리며 완력을 과시하는 용감함이 아니라 느리고 작은 존재가 신비롭게 보여주는 태연함. 극한의 날씨를 버티며 유빙의 바다를 수용하는 펭귄들이 모습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동과 경이."(p. 63)

1월 27일 한국을 출발한 저자는 남극의 관문인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대기한 후, 2024년 2월 1일에야 비로소 남극 땅을 밟는다. 오랜 비행 끝에 20대부터 꿈꿨던 곳에 당도했을 때 저자가 느꼈을 감격을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10년 전, 프랑스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에펠탑을 목격한 순간의 벅찬 감동이 조금이나마 엇비슷할까. 물론 남극에 비할 바는 아니리라.

『나의 폴라 일지』에는 저자가 세종 기지에 체류하며 남극에서 서식하는 동식물을 살펴본 이야기, 그곳에서 각종 연구 중인 과학자들과 교류한 취재기가 꼼꼼히 담겨 있다. 흔히 남극에 관한 책이라 하면 연구원 등이 저술한 전문서적이 떠오르고 딱딱하고 무거운 내용이라 생각되지만, 『나의 폴라 일지』는 철저한 비전문가의 관찰기라는 점에서 색다르고 흥미진진하다.

남극에서는 2인 1조가 기본이라 혼자서는 기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공동생활이 강제되지만,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남극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맛난 음식을 먹고, 특별한 윷놀이를 하며 설 연휴를 보낸다. 또, 끼와 열정이 넘치는 과학자들이 있다. 작가로서 혼자 일하는 게 익숙했을 저자는 다양한 국적 및 직업군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남극에서 내 시간은 여행도 취재도 연구도 아니라 '사는 것'이었다. 관계를 만들고 호의, 기쁨, 감동과 경이, 긴장, 때론 불안과 불쾌 같은 순간순간의 감정을 지닌 채 하루하루 일상을 만들어가는 것. 그렇기에 그리움은 더할 것이었다." (p. 276-277)

책을 읽다보면 '비펭귄'이라는 단어에 확 꽂힌다. 애당초 남극은 펭귄들의 땅이니 인간은 손님인 셈이다. 이미 그곳에 완벽히 적응을 마친 펭귄과 달리 인간이 남극에서 살기 위해서는 뚜꺼운 방한복을 껴입어야 하고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 이처럼 남극은 자연의 질서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시하는 장소이다. '비펭귄'으로서 인간을 자각하는 순간들이 신선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빠의 (사실상 반대에 가까운) 만류에도 남극으로 향했던 저자의 고심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음 한 켠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다행히도 그는 남극에서 보낸 한 달의 시간을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과 평화, 인간종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만들어냈던 꿈결 같은 일상"이었다고 회상했고, "내가 남극까지 간 건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같다"고 단언했다.

국내 소설가 사상 최초로 쓴 남극 체류기 『나의 폴라 일지』는 김금희가 앞으로 쓸 남극이 배경인 소설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남극에 매혹당한 그는 더더욱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한편, 저자는 『나의 폴라 일지』를 "다음 세대를 살아가야 하는 청소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며 10대가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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