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이세돌 VS 알파고 대결에 쏠리는 관심, 쇠퇴기의 한국 바둑도 뜰까?

너의길을가라 2016. 3. 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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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의 집중력으로 내리 3연승(일본의 무라카와 다이스케 8단, 중국의 롄샤오 7단, 일본 1인자 이야마 유타 9단에 승리)을 거둔 '쎈돌' 이세돌 9단이었지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난 5일 열렸던 제17회 농심배 최종국에서 이세돌 9단은 '라이벌'이자 '천적'인 중국의 커제 9단에게 243수 만에 불계패(승부가 뚜렷하게 나타나 집 수를 셀 필요 없이 지는 것을 의미, 일종의 항복 선언) 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대표 기사 5명이 연승전 방식으로 국가 대항전을 펼치는 농심배는 '연승'을 통해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매력적인 대회다. 대역전극이라는 시나리오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되기도 하고,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하기도 한다. 지난 2005년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던 이창호 9단이 5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이끌었던 '상하이 기적'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tvN 드라마 <미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도 '바둑'을 극의 전개에 있어 주요한 소재로 사용했다. 박보검이 연기한 최택 6단이 실존 인물인 이창호 9단을 모델로 했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응답하라 1988>은 저 유명한 이창호 9단의 '상하이 기적'을 똑같이 재현하기도 했다. 두 드라마를 통해 '바둑'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바둑이 처해 있는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실제로 '응팔시대'는 바둑의 인기가 절정기였다. 1988년은 프로바둑 세계대회가 탄생하는 등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가 출범(약칭 후지쯔배, 2011년 중지)했고, 응씨배가 시작됐다. 1970~90년대 한국 바둑을 주름잡던 조훈현 9단은 1989년 응씨배 1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 해 국민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다.


하지만 한국 바둑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제 나타난다. 혜성(彗星)처럼 등장한 이창호 9단은 그의 스승을 꺾고 세계 바둑을 재패했다. 탁월한 끝내기 솜씨로 신산(神算)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9단은 1989년 14세에 제8기 KBS 바둑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17세였던 1992년에는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해 최연소 세계챔피언이 됐다. 


'바둑 천재'의 등장으로 대한민국 사회는 바둑에 대한 열기로 들끓었다. 90년대까지 바둑학원은 집중력과 자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밟아야 하는 필수코스로 여겨졌다. 실제로 90년대에는 바둑학원이 무려 1,500개에 이를 정도였다. 바둑 잡지인 『월간 바둑』은 매월 10만 부를 찍어냈고, '바둑TV는 방송을 시작한 지 약 1년 만에 시청률에서 선두권에 진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둑의 인기는 시나브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두뇌 스포츠'의 아성은 바둑에서 '컴퓨터 게임'으로 넘어갔다. 지난 2011년 양재호 9단은 "바둑은 지금 황혼이다. 명이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위기를 극복해 국민 스포츠로 되살려 내는 일에 나를 불사르고 싶다"며 성찰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역시 위기의 본질은 유소년 층을 비롯한 젊은 바둑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기설은 곧 현실이 됐고, 이제 바둑은 '아저씨들이 하는 고리타분한 게임'으로 전락했다. 박정환 9단, 이세돌 9단을 비롯해 정상급 기사들이 여전히 세계 무대를 호령하고 있지만, 바둑의 저변이 협소한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소수의 기사들에 의존하는 기형적인 성공이 계속되길 기대할 순 없다. 인프라의 확대를 위해 국가적 지원도 절실하고, 바둑계의 환골탈태도 불가피한 형편이다.



한편, 바둑계는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이세돌 9단은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AlphaGo)'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 이 승부는 '인류 VS 기계'의 대결로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닌데, 연일 관련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에 걸리고 있다. 침체기를 넘어 쇠퇴기에 빠져 있던 한국 바둑계로서는 부활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인공지능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인간을 따라잡아왔고, 이미 대부분의 영역에서 인간을 추월했다. 실제로 체스의 경우에는 1997년에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당시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에 승리(전체 승부에서는 카스파로프가 3승 2무 1패로 승리했지만)를 거뒀고, 2005년에 아랍에미리트의 슈퍼컴 3대가 인간을 꺾으면서 완전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바둑'만큼은 예외였다. 예측 가능한 수가 제한되어 있는 체스와 달리 바둑은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다. 그런 만큼 인공지능의 발달 속도를 감안하더라도 향후 20~30년 간은 도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알파고는 지난해 10월 판후이 2단과의 대결에서 5대0의 압승을 거뒀다. 이제 바둑에서조차 인간의 우위는 사라지는 것일까? 


물론 판후이 2단의 기력은 아마추어 최강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고, 프로 최강급 실력을 갖춘 이세돌 9단은 "판후이 2단과의 대국에서 알파고의 수준은 나에게 승부를 논할 기력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또, "5판 중 3판을 이기면 최종 승자가 되지만, 1패라도 당하면 내가 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대국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강한 자심감을 내비쳤다. 



"프로기사로서, 모두가 이세돌의 승리를 바란다. 그러나 바둑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흔히 바둑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고들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바둑은 단순한 수 싸움이 아니다" (김인 9단)


어느 쪽이 승리해도 큰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승부는 어떻게 될까? '알파고'의 승리를 점치는 쪽은 "100만번의 대국을 4주 만에 소화하는 등 스스로 지능을 키우는 자기학습능력이 알파고의 최대 무기다. 심리적 압박도 없고, 현 상태에서 최선의 수를 빠르고 정확히 연산할 수 있는 알파고가 승리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반면, "인공지능이 언젠가 인간과 대등한 수준의 바둑실력을 뽐낼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며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알파고는) 관측과 포석에 약하고, 정석 외에 약'하고, '자기 반성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파고가 익힌 기보들의 대부분은 프로기사의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 이른바 '떡수(바둑 중에 나오는 실수 착점이나 어지러운 착수)'까지 몽땅 익혀버린 건 치명적이다.



세계의 눈이, 사람들이 시선이 내일(9일) 오후 1시에 열릴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판에 집중되고 있다. 물론 대결의 향방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눈은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바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움트고 있는 이 시점에 바둑계는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980~90년대 한국 사회를 들썩였던 바둑의 인기를 다시 재현하기 위한 노력 말이다. 그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대 바둑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 조남철 9단은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그중에서 훌륭한 기사가 나올 것 아니냐. 그러니까 저변 확대에 전력을 쏟아야죠"고 말한 바 있다. 지금이야 세계 최강의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암흑기가 도래할지 알 수 없는 바둑계의 현실은 '책도 안 읽으면서 노벨 문학상을 바라'는 문학계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들어 아찔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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