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옛말이 된 '개천에서 용 난다', 진짜 문제는 '개천'이야!

너의길을가라 2016. 3. 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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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 난다 : 시원찮은 환경이나 변변찮은 부모에게서 빼어난 인물이 나는 경우를 이르는 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낭만적(浪漫的)이다.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얻어낸 개인의 성취,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언가에 매진(邁進)한 개인의 영광, 그 과정이나 결과가 주는 카타르시스(Catharsis)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이는 곧 '나도 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불공정한 사회를 유지하는 하나의 '시크릿(Secret)'으로 기능했다.



미국 사회를 유지시켰던 하나의 관념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 즉 모든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 미국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해 돈과 명예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미국인들의 '도전 정신'을 불타오르게 했다. 그것은 (계급을 순화시킨) 계층 간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보이)게 만들었고, 사회에 활기를 돋게 만들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활력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다양한 분야에도 적용이 됐는데, 가령 '길거리 캐스팅'만 봐도 그러하다. 영화 이론가 리처드 다이어(Richard Dyer)는 길거리 캐스팅이 1920년대 할리우드가 개발한 홍보 전략이라면서, 영화계와 전혀 관계가 없는 하층민 출신의 순진한 처녀가 우연한 기회에 영화인의 눈에 띄어 연기자가 되고, 급기야 스타로 발돋움하는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의 할리우드판 버전이라 설명한다.



그 성취의 이유가 노력이든 운이든 간에 '계층 간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분명 낭만적인 일이다. 어쩌면 역사는 그 계층 간의 이동의 '가능성'을 높이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피(혈통)'가 전부였던 전근대와 달리 근대는 '노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씩 커졌다. 사람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도 올라갈 수 있다. '저들'과 함께 밥을 먹고 와인 한 잔을 나눌 수 있다. 저들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혈통'만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진 기득권은 사람들을 꾈 '미끼'가 필요했고, 그건 '너희도 우리와 같아질 수 있다'는 '마취제'였다. 정신이 몽롱해졌기 때문일까. '성공'에 대한 욕망이 지독했던 탓일까. 하지만 그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동아줄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 전북일보


'그렇지만 아무나 우리와 같아질 수는 없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지.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강한 몇 명만 우리처럼 될 수 있어.' 


'개천에서 용 나'는 대표적인 예는 '시험'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법고시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시골의 가난한 집의 똑똑한 아들이 사시를 패스하고 판·검사가 돼 인생 역전을 이루는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의 대한민국 버전일 것이다. 그 낭만이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사법고시 폐지에 강렬한 반발로 이어지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어째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마지막 문'을 닫으려 하는가'라는 사람들의 비판(은 번짓수를 잘못 찾은 것이지만)은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지난 10년 간 사법고시 합격자 중에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5명뿐이라는 사실과 사법고시 합격과 사법고시 합격과 출신 학교(대학은 또 어떤가)와 집안의 재력이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가볍게 외면되기 일쑤지만 말이다. 



물론 이 글에서 사법고시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은 없다. 문제제기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꾸는 게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에서 그동안 주목했던 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그 '승천'의 쾌감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왜 '개천' 그 자체에 주목하지 않는가. 개천을 '강'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인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의 정의를 보라. '시원찮은 환경이나 변변찮은 부모'라니! 이 얼마나 모욕적인 표현인가? 스스로 '용'이 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나'만' 용이 돼 승천하고 나면 끝인 걸까? 지난 1월 31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여유진 · 정해식 연구원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를 거쳐 정보화세대로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직업지위와 계층의 고착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Ⅱ」)



(http://www.datanews.co.kr/news/article.html?no=42436)


굳이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헬조선'의 현실은 이미 끔찍하다.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계급 사회의 허탈감은 이제 그 실체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문은 이미 닫힌지 오래다.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건 혹시 '개천에서 난 용'들이 자신의 성취를 개인의 노력 덕분이라고만 여기고, 더 이상 '개천'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개천에서 용 나는' 신화에 감탄한 사람들은 스스로와 그들의 자녀를 여전히 '개천에서 나는 용'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누구도 '개천'을 '강'으로 바꾸려는 구조적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왜 우리는 까마득한 가능성에 우리들의 삶을 내맡겼던 것일까? '변변찮은 환경이나 변변찮은 부모'로만 남으려 했던 것일까? 어째서 그것이 온당한 세상의 이치라고 믿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절이 좋았다고. 어떤 정치인은 말한다.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는 룰이 다 말라버렸다고. 개천이 다 무너졌다고. 그 선의를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틀을 벗어나야 한다. 왜 우리는 처음부터 '개천'에서 비롯되어야만 하는가. 치열한 경쟁 사회에 '적응'해야만 하는가. 우리 스스로를 왜 전쟁터로 내모는가. 


진짜 정치는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는 룰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개천을 강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일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을 개천에서 나는 용이 되는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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