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흑백차별에 둘러싸여 인종차별을 놓친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너의길을가라 2016. 3. 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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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불운의 역사를 끊어내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빛을 볼 수 있을까?' 지난달 28일 열린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스카 5수생'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남우주연상 수상 여부로 엄청난 관심을 불러모았다. <레버넌트>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그는 끝내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이어 멋드러진 수상 소감으로 전세계의 시청자들을 감동의 도가니 속에 빠뜨렸다.



"지난해는 역대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됐습니다. <레버넌트>를 찍을 때 눈을 찾기 위해 남극 가까이로 가야할 정도였습니다. 기후 변화는 현실입니다.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위험입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공해 유발자와 대기업의 대변인이 아니라 환경 파괴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수십억 보통 사람들을 위해 힘써줄 지도자들에게 힘을 모아 줍시다. 우리 아이들의 아들 딸들을 위해 그리고 탐욕의 정치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이 놀라운 상을 받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대자연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지 맙시다. 저도 오늘밤 이 순간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상 소감으로 '자연'을 이야기하는 배우. 그리고 '정치'를 이야기하는 배우. 정말 품위있지 않은가? 그가 아카데미를 얼마나 고대해왔겠는가. 그럼에도 그저 덤덤하게 '자연'과 '정치'라는 평소의 소신을 전달하는 모습은 묵직하고도 묘한 울림을 줬다. '대자연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자신도 오늘밤 이 순간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저 남자에게 어느 누가 매혹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카데미가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윌 스미스)


한편, 인종 간의 갈등을 잘 드러내는 이른바 '백인 잔치' 논란은 빼놓을 수 없는 화제였다. 지난해에 이해 올해도 남녀 주 · 조연상 후보 20명이 전부 백인 배우로 채워진 것을 두고, '백인만의 잔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OscarsSoWhite'(오스카는 백인중심적)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비판 글들이 쏟아졌다. 스파이크 리 감독을 비롯해 윌 스미스 등은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흑인 배우 겸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어떤 발언을 쏟아낼지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이미 지난 2005년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사회를 맡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조롱한 전력(前歷) 있었기에 사이다 발언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방송용 발언으로 마무리 될까라는 '우려'가 공존했다. 



드디어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오른 록은 "흑인들의 불참 사태 때문에 사회를 거절할까 고민했다. 난 실업자이고, 이 자리를 백인인 닐 패트릭 해리스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면서 포문을 열었다. 이어서 그는 "흑인 후보자들이 대한 논란이 계속될 바에야 차라리 남녀 배우상 범주를 나누듯 흑인을 위한 상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연기로만 얘기하면 충분한 것 아니냐"며 날카롭게 꼬집었다. 


"우리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기회를 원할 뿐. 그것이 다"라는 록의 말은 뿌리깊은 인종차별에 맞서 줄기차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쳤던 흑인들이 거듭 주장해왔던 내용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와 노예주의 아이들이 형제애라는 탁자에 함께 앉을 수 있으리라는…."이라는 연설을 남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백인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지는 등 흑인들의 인권운동의 역사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지난 2009년 최초의 (어찌됐든)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미국이지만,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요원(遙遠)하다. 오히려 더 심화됐다는 주장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4년 퍼거슨 시에서 18살 흑인 소년이 백인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은 미국 내에서 흑인차별이 '일상'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 최초 대통령인 자신의 존재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는 어느 정도 개선됐지만 '노예제 유산'은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여전히 DNA 일부분에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공공장소에서 니그로(깜둥이)와 같은 인종차별적인 N-워드를 사용하는 것 예의없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 잔치' 논란에 휩싸인 아카데미는 '인종 다양성'을 고심한 티를 제법 냈는데, 이병헌이 외국어영화상 시상자로 나선 것은 상징적이다. 또, 케빈 하트, 우피 골드버그 등 여러 흑인 배우와 가수들이 시상자로 참석했다. 하지만 흑인들이 보기에 이러한 조치들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록이 날선 비판으로 아카데미를 '조롱'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흑인 차별' 문제를 제기하며 '흑인 인권'을 외친 록은 부적절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발언에 또 다른 '인종 차별'이 담겨져 있있기 때문이다. 록은 수상자 투표를 집계하는 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를 소개하겠다면서 아시아계 어린이 3명을 무대 위로 불렀다. 그러면서 그는 "미래에 훌륭한 회계사가 될 3명을 소개한다. (투표 관리 회사는) 헌신적이고 근면한 직원들을 보냈다. 농담이 불쾌했다면 (그렇다고) 트위터에 올려라. 물론 스마트폰은 모두 어린이들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시아계 '어린이'를 무대 위에 세워두고 '미래에 훌륭한 회계사가 될 3명을 소개한다'는 록의 발언은 아시아인들이 계산에 밝고 수학을 잘한다는 고정관념을 드러낸 것이고, '헌신적이고 근면한 직원들을 보냈다'는 표현 역시 아시아인들은 '소처럼 일한다'는 편견이 만든 허상이다. 게다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이런 너저분한 농담을 늘어놓는 것은 참으로 볼썽사나워보였다.


시상식이 끝난 직후 중국계 여배우 콘스탄스 우는 "어린 아이들에게 대사 한마디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인종주의적 농담의 대상으로 만들다니 역겹다"며 비난했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아카데미상의 흑인 차별에 대한 비판은 제기됐지만 아시아계, 라틴아메리카계 등 소수인종에 대한 관심은 밀려났으며 이들이 오히려 불편한 농담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자신을 '둘러싼' 차별(흑인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록이 자신이 '가하는' 차별(또 다른 인종차별)에 저토록 둔감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그를 엎어 메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머무른다면 록의 태도가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들을 죄다 놓쳐버리는 꼴이다. 우리는 불편함과 동시에 뜨끔함을 느껴야만 한다.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할리우드를 넘어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에서 아시아인들이 처해있는 입지가 얼마나 열악한지 우리는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퀘퀘묵은 '인종차별'의 그늘은 여전히 짙고, 어쩌면 각자도생이라고 하는 고리타분한 방식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흑인들은 백인 바로 밑이라는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인종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와 함께 우리 안에도 '록의 태도',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심결에 가하고 있는 '인종 차별'은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백인'에 대해 심각한 저자세를 취하는 반면, '흑인'이나 '동남아시아인'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오지 않았던가?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고심해 볼 필요가 있다. 록의 태도가 던져준 숙제는 생각보다 무겁다.


방정맞았던 록보다 2년 연속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수상 소감이 더욱 가슴을 울린다. "아직도 피부색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굉장히 운이 좋다. 이러한 피부색이란 것이 우리의 머리 길이 만큼 의미없는 말이 되길 바란다" 록의 반성만큼이나 우리들의 반성도 뒤따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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