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이 '촛불'을 대체하고 있다. 윤석열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던 7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익숙한 케이팝이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로제의 '아파트', 에스파의 '위플래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등에 맞춰 떼창을 불렀다. 소위 'MZ세대'라 불리는 2030세대들의 손에는 무언가 쥐어져 있었다. 노래를 따라부르며 열렬히 흔들었던 그 물건은 바로 '응원봉'이었다.
방탄소년단부터 뉴진스, 블랙핑크, 빅뱅, 아이유, 아이브, 엔씨티 등 다양한 아이돌의 응원봉이 등장했다. 어느 가수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나왔을 뿐이다. 다양성은 오히려 존중받았고, 개별성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과거의 비장하고 경직된 시위와는 달랐다. '촛불'의 경이로움과는 또 다른 시위 문화의 시작이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2030 여성들이 있다. 뉴스타파가 '생활인구 데이터(서울시 제공)'를 토대로 7일 열린 국회 앞 집회 참석 인원을 추산한 결과, 전체 참석자 28만 명(최소 기준) 중 2030여성의 비중은 전체의 28%에 달했다.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건 20대 여성으로 17%였다.) 변화는 변화를 추동하기 마련이다. 이제 시위 현장에는 1세대 아이돌 god나 가왕 조용필의 응원봉도 등장했다.
변화하는 시위 문화에 발맞춰 가요계도 열렬히 화답했다. 아이유의 소속사 이담엔터테인먼트는 "추운 날씨에 '아이크'(아이유 응원봉)를 들고 집회에 참석해 주변을 환히 밝히는 '유애나'(아이유 팬덤)의 언 손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길 바라며 먹거리와 핫팩을 준비"했다며 선결제 사실을 밝혔다. 소녀시대의 유리도 "다들 내일 김밥 먹고 배 든든히 해. 안전 조심, 건강 조심. '다만세' 잘 불러봐."라며 응원했다.
선배 가수들도 나섰다. 신대철, 윤종신, 이은미 등이 참여한 대한민국음악인연대는 "우리는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우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의 건강한 창작 환경을 요구하며 시국선언에 나"선다며 "오늘부터 우리는 현 대통령이 즉각 퇴진하거나 탄핵 통과, 더 나아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어 나라가 정상화될 때까지 시민들 속에서 함께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이승환이다. 7일,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의 집단 퇴장으로 탄핵 표결이 무산된 직후 이승환은 "국민의 힘 의원 나리 님들, 내란의 공범임을 자처하는 모습 잘 보았습니다. 좋으시죠? 대통령 탄핵을 원하는 80%에 가까운 민주시민들의 뜻을 단박에 저버릴 수 있는 자신들의 권능이 자랑스럽고 뿌듯하시죠?"라며 날선 비판을 제기했다.
이후 탄핵 콘서트가 준비되는 과정에서 이승환은 "전 개런티 다 필요 없고 제 기준에서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음향시스템이 있어야 해요. 소리 덕후가 그 정돈 요구할 수 있잖아요."라며 참여를 시사했다. 그리고 13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 그가 나타났다. 2차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시점, 촛불행동이 주최한 '탄핵 콘서트'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어제 윤석열 담화보고 너무 놀랐다, 나를 (공산당으로) 오해하는데 내 출신은 부산, 강남8학구 출신이다. 보수 엘리트코트 밟은 사람, 이런 내가 오죽했으면 이렇겠나. 난 자본주의, 민주주의다. 내일은 무조건 (탄핵으로) 끝내길, 집회 더이상 안 하고 싶다, 춥다." (이승환)
무대에 오른 이승환은 자신을 "탄핵집회 전문가수"라고 소개한 후 2016년 박근혜 퇴진집회, 2019년 검찰개혁 조국수호 집회를 끝으로 "다신 이런 집회 무대 안 설줄 알았는데 또 다시 노구를 이끌고, 거동이 불편한 채로 오게 돼 심히 유감"이라 밝혔다. 또, "내일 국회에서 이 XX들이 탄핵하면 윤석열은 쪽팔려서 어떡하냐"며 '바이든-날리면' 사건을 패러디해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승환은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사랑하나요', '덩크슛', '물어본다', '돈의 신', '슈퍼히어로' 등 6곡을 불렀고, 앙코르곡으로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열창했다. '덩크슛' 무대에서는 가사를 일부 개사해서 "윤석열 탄핵할 수 있다면", "주문을 외워보자 내려와라 윤석열, 내려와라 윤석열" 등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간주 중에 "탄핵"을 외치며 호응을 유도했다.
오늘(14일) 16시, 국회에서 2차 탄핵안 투표가 이뤄질 예정이다. 가결 여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권선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아직까지 당론은 부결이라며 맞서고 있다. 하지만 이미 7명(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조경태, 김재섭, 진종오, 한지아)이 공개적으로 찬성 투표를 하겠다고 밝혔고, 익명으로 찬성 의견을 밝힌 의원도 있어 탄핵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이 엄청나게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이런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휘두르는 응원봉, '탄핵봉'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응원봉을 보면서 너무 미안했어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최민식)
위법하고 위헌적인, 미성숙하고 유아적인 윤석열의 12·3 내란에 맞서 평화적인 시위로 대응하는 시민들의 성숙함에 경외심이 든다. 그 상징으로 촛불에 이어 등장한 응원봉은 시위 문화가 새로운 변곡점에 접어들었음를 잘 보여준다. 응원봉이 전면에 등장한 시위 문화가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그래도 응원봉이 보다 잘 어울리는 곳은 공연장일 것이다. 국회에서 탄핵이 통과되고, 하루빨리 모든 것이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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