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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당이 사람 잡은 이경규의 '존중 냉장고', 진돗개는 죄가 없다

너의길을가라 2024. 5. 1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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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규와 '몰래 카메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지금에서야 '불법 촬영'이라는 인식이 강해져 더 이상 방송에서 '몰래' 타인을 관찰하는 행위를 하지 않지만, 90년대만 해도 그런 방식이 용인되는 걸 넘어 즐김의 대상이었다. 이경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양심냉장고'는 '몰래 카메라'의 공익 버전으로, 야심한 시간대에 정지선을 지키는 운전자에게 냉장고를 선물하는 내용이었다.

지난 10일, '애견인'으로 유명한 이경규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르크크 이경규'에서 '존중 냉장고 : 존잘상(존중 잘하는 대상)을 찾아서 Ep.01' 영상을 공개했다. 이경규는 가수 김요한, 나나와 함께 반려견 산책을 잘 시키는 견주를 찾아나섰다. 펫티켓을 잘 지키는 사람을 찾아 냉장고를 선물하는 게 해당 콘텐츠의 취지였다. 1회 존잘상의 기준은 매너 워터, 인식표, 입마개였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가 1500만 시대를 맞이한 만큼 펫티켓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커지는 분위기를 반영한 시의적절한 콘텐츠였다. 동네 산책을 가거나 공원에 나가면 반려견과 함께 거리로 나온 견주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태를 보이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입마개를 하지 않은 개들 중에서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케이스가 있어 불안한 게 사실이다.

평소 '애견인'으로 유명한 이경규가 KBS2 '개는 훌륭하다'에서 4년 넘게 MC를 맡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반려동물 관련 새로운 콘텐츠를 선보여 기대를 모았지만, 애석하게도 출발부터 삐거덕대는 모양새다. 논란의 핵심은 진돗개 혐오 조장 및 시민을 대상으로 한 몰래 카메라인데, 대중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문제가 된 장면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해당 방송에서 이경규는 "대형견과 산책을 할 때는 입마개를 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진돗개는 입마개를 안 해도 법적으로 괜찮"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진돗개는 맹견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입마개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다른 분들이 봤을 때 '저거 좀 위협적인데' 하고 생각할 수 있어 입마개를 착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분들이 존중의 대상"이라 정의했다.

위와 같은 설명은 오해의 소지가 많아 보인다. 맹견이 아니라 입마개 의무가 없는 진돗개에게 입마개를 씌운 보호자를 찾아서 상으로 냉장고를 준다는 것 아닌가. 단서로 "다른 분들이 봤을 때 좀 위협적이라 생각"될 수 있다는 점을 들었지만, 이런 기준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문제는 그 대상을 '진돗개'로 특정지었다는 점이다. 진돗개가 무슨 죄란 말인가.

화면에는 진돗개와 산책하는 보호자들의 모습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앞서 진돗개의 입마개가 필수가 아니라는 설명(및 자막)과 달리 이경규는 진돗개가 등장할 때마다 "입마개를 안 했"다며 아쉬워 했다. 제작진은 "이번에도 입마개 없음"이라는 자막이 달아 마치 진돗개의 보호자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마냥 묘사했다. 시청자들도 충분히 오해할 상황이었다.

반면, 사모예드, 말라뮤트 등 진돗개보다 몸집이 훨씬 큰 다른 대형견이 카메라에 포착됐을 때는 입마개 착용이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결국 애당초 '대형견 입마개 착용'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기보다 '입마개 착용한 진돗개'를 찾는 것에만 꽂혀 있었다는 얘기다. 아무리 유튜브 방송이라고 해도 이런 낮은 수준의 접근이라면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영상 공개 후, 한 누리꾼은 "영상에 나온 진돗개 견주입니다"라며 장문의 댓글을 게시했다. "진돗개 견주로 살면서 참 억울한 순간이 많았"다는 누리꾼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제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이 촬영돼 유명인이 진돗개 혐오를 조장하는 도구로 쓰인다니 제 강아지를 입양하고 가장 힘든 순간"이라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학대받은 강아지를 보호소에서 입양해서 저렇게 멀쩡하게 산책시키기까지 저의 어떠한 노력이 들어간 과정은 싸그리 무시된 채 그저 입마개 없이 남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무지한 견주로 박제가 돼버렸다"


우리가 어떤 반려견에 대한 '위험성'을 판단하려면 여러가지 정보가 필요하다. '개는 훌륭하다'에서도 보호자와 반려견의 관계를 충분히 청취하고, 문제 행동에 대해 긴 시간 동안 관찰하지 않던가. 이런 준비 과정 없이 '몰래' 카메라로 관찰하며 입마개를 하지 않았다고 힐난하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다. 게다가 보호자들에게 아무런 해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당장 이경규에게 저격을 당한 누리꾼은 모자이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저와 강아지의 인상착의가 다 나와있"는 모욕적 영상을 동의 없이 올렸다며 법률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몰래' 촬영된 다른 누리꾼역시 "산책 중 촬영에 대해 고지받은 적이 없다.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인데 왜 당사자 동의 없이 몰래 촬영해서 올리시는 거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해당 영상은 조회수가 8만 건을 훌쩍 넘어설 화제가 됐고, 논란이 증폭됨에 따라 누리꾼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보호자만 보면서 얌전히 산책하는 진돗개에게 왜 그러냐', '견주 허락 없이 촬영한 거 사과해라', '혐오를 조장한다'며 제작진을 비판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비반려인 입장에서는 입마개를 필수로 해줬으면 한다, '견주들이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눈에 띠었다.

"입마개를 안 해도 되는 개가 입마개를 안 한 것과 동의도 받지 않고 촬영해서 다수가 보는 영상에서 평가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설채현)


한 가지 분명한 건, 이경규의 '존중 냉장고'가 부정적 형식(몰래 카메라)을 내세워 부정적 내용(입마개 의무가 없는 진돗개를 타깃으로 삼아 보호자를 힐난)으로 부정적 갈등을 조장했다는 점이다. 반려문화 성숙에 앞장서고자 했던 선의는 이해하지만, 접근 방식에서 문제를 드러낸 셈이다. 한편, 제작진은 14일 밤 11시 30분 무렵 짧은 사과문을 게시했다.

하지만 반려인들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13일, 수의사 겸 동물훈련사 설채현도 자신의 SNS에 '존중냉장고'에 대한 비판글을 게시했다. 그동안 구설수 없었던 이경규가 위기를 맞았다. 아무리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만, 진정성과 신뢰도를 갖춘 전문가 없이 반려견 문제에 뛰어든 건 무리였다는 평가다. '애견인'으로 쌓아올린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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