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여러 차례 하다보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구축된다. 한두 번만으로 이뤄지긴 어렵고, 누적된 경험을 통해 시나브로 완성된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완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는 필연과도 같아서 '사람'이 변하든지, '환경'과 '여건'이 변하면 스타일도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미 형성된 큰 틀 안에서 작은 변화들이 가미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가 하면 틀마저도 뿌리채 바뀌는 경우도 있다. 기존의 방식과 전혀 다른 여행을 기획할 수도 있다.
나에게 여행은 '탐구'에 가까웠다. ('탐험'은 아니다.) 미지의 세계가 궁금했고,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 세상을 알기 위해 걸었다. 여행을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면 부지런히 걸어다닌다. (물론 대중교통도 적절히 이용한다.) 조금 고생스럽긴 하지만, 걸음으로 익힌 공간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발의 기억력은 남다르다. 그렇게 여행지를 탐구하다 보면 그곳은 '지나쳤던 곳'이 아니라 최소한 '머물렀던 곳'이 된다. 그 공간이 걸음의 학습을 통해 다른 무게감을 갖게 되는 순간이 좋다.
구라시키의 개성있는 빈지티 가페 'RACOFFE'
그런 여행은 언제나 만족스럽긴 했지만('뿌듯했다'에 좀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좀더 여유있게 즐길 수는 없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한참동안 쫓아왔다. 매번 새로운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이번에는 느긋하게 동네 카페에 앉아 책도 읽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을 가져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가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된다. 당장 가보고 싶은 곳이 저렇게 많은데, 한가롭게 휴식이라니!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매번 성공적이지만, 또한 실패이기도 하다. 이번에 '구라시키(倉敷, Kurashiki)'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변화', 기존의 여행 스타일에서 벗어나 보고 싶었다. 갓 곳도 볼 것도 넘쳐나는 대도시가 아닌 '구라시키 미관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 나를 가둠으로써 '여유'를 반강제하고자 했다. 왠지 그곳에서는 발걸음도 느긋해지고, 마음가짐도 초연해질 것 같았다. 그 근거가 된 건 구라시키 미관지구의 풍경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물론 계획은 초장부터 실패의 조짐이 엿보였다. 오사카에서 1박을 하게 되면서 대도시의 기운을 흠뻑 맞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오사카와 구라시키의 다른 분위기를 비교 체험한다는 구실을 붙여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실제로 그 상대성은 훨씬 더 큰 만족감을 가져오긴 했다. 그러나 평가는 사후적인 것일 뿐, 당시만 해도 가뜩이나 짧은 3박 4일의 일정 가운데 하루가 사라지니 마음이 쫓기는 기분도 들었다. 구라시키에서 예정된 여유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구라시키 역
신오사카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오카야마에 도착했고, 오카야먀에서 JR(산요 본선)을 타고 구라시키로 향했다. 거리(193km)에 비해 이동시간은 턱없이 짧게 느껴졌다. 신오사카 역에서 오카야마까지 고작 46분 정도, 오카야마에서 구라시키까지 17분 가량이 소요됐다. 환승 시간까지 포함해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도 1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걸 감안하면 구라시키도 오사카의 '근교'라 할 만했다. 물론 이때 기준은 거리가 아니라 시간이다.
구라시키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심호흡'이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졌고, 내 안에 자리잡은 탁한 것으로 그 숨에 얹져 내보내고 싶어졌다. 역 내부는 더 이상 복잡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한적한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역무원들의 표정부터 다른 것 같았다. 역을 나와 육교를 따라 걷는 데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자그마한 도로와 좁다란 골목, 요란하지 않은 상가와 수더분해 보이는 사람들이 자꾸만 밀려왔다. '여기가 구라시키구나!'
구라시키 미관지구로 가는 길
엄청난 속도로 내달린 신칸센이 1차적으로 손 봐주었던, 쫓겼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치유됐다. 더 이상 송곳처럼 귓가를 파고드는 요란스러운 소음도 들리지 않았고,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피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됐다. 당연히 어깨를 부딪치는 불쾌한 일도 없었다. 문득 깨달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보였고,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보였다.
그렇게 구라시키와 인사를 나누며 구라시키츄오 거리를 따라 10분 정도를 걸었을까.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왼쪽으로 전통적인 분위기의 건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에 진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오른쪽에는 현대적인 건물의 자연사 박물관과 시립 미술관이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왠지 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가지 않았다.) 잠깐 동안의 이질적인 공간감은 곧 사라졌다.
큰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시라카베 거리를 따라 걸었다. 숙소(구라시키 아이비 스퀘어)로 가기 위한 경로였다. (나중에는 골목으로 연결된 지름길을 찾아 굳이 큰길을 걷지 않았다.) 좀더 작은 도로가 펼쳐졌고, 눈앞에 인공 운하가 나타났다. 이 멎는 것만 같았다. '네가 나를 여기로 불렀구나!' 구라시키를 선택하게 했던 한 장의 사진에 담겼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기대치를 훨씬 초과하는 감동이 몰려왔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관광지인 구라시키를 위해서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좋았던 점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 느슨함이 좋았다. 긴장도 자연스레 풀어졌다. 완벽한 타지(他地)가 주는 의외의 안도감이었다. 드디어 세상으로부터 벗어났다. 여기엔 그 어떤 압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안심 말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해방감도 한목했겠지만, 한없이 평온한 마을이 가없이 평안한 마음을 가져왔던 것이라 믿는다.
구라시키 커피관(倉敷珈琲館)
그래서 '계획'은 성공했냐고? 탐구심은 여전했다. 이번에도 구라시키의 구석구석을 걸었다. 또,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아침 산책을 나섰다. 오카야마로의 탈출을 꿈꾸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숙소에 들러 짐을 챙겨 나오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람에 구라시키에 묶이게 됐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책을 집어들고 운하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김훈의 『연필로 쓰다』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번갈아 가며 읽었다.
김훈은 '밥과 똥의 무게'에 대해 강변했고, 김영하는 '여행의 실패'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구라시키에는 조금씩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가야 할 시간이다. 뭘 먹는 게 좋을까. 그러고 보니 아직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저녁을 먹으면 갈 수 있을까.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호텔에서 빌려준 우산도 잊지 않았다. 문득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그래, 절반의 실패쯤으로 하자. 그 정도면 됐다. 근데, 왜 이렇게 여유로워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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