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도로명 주소, 호율과 전통을 모두 잃은 성급했던 졸속 행정

너의길을가라 2014. 1. 23.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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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헌혈의 집을 찾았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간호사 분의 안내에 따르면, 도로명 주소를 알지 못하면 헌혈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헌혈의 집에 비치되어 있는 컴퓨터로 검색을 하고 무사히 헌혈을 마칠 수 있었지만, 내 주소가 갑자기 바뀐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도대체 정부는 왜 갑자기 기존의 주소 체계를 폐기하고 도로명 주소를 시행한 것일까? 



- <뉴시스> 에서 발췌 - 


지난 2013년 9월 9일 MBC 뉴스에 출연한 유정복 안행부 장관의 인터뷰와 지난 2013년 11월 13일 JTBC 정관용라이브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Q. 도대체 도로명주소라는 건 왜 도입하게 됐는지 그 취지부터 설명해 주시죠.


A. 우리가 기존에 쓰던 주소가 일제시대 때 수탈의 한 방편으로 주소체계를 써왔는데 이제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에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도시화가 이루어져서 사실상의 도로와 건물 중심으로 주소체계를 하는 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도로와 건물에 번호를 부여해가지고 알기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서 이렇게 되면 각종 물류비용도 줄이고 또 어떤 응급구조 시에 쉽게 이런 부분에 대처도 하고 이런 체계로 바꾼 것이고요. 결국은 국민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주소체계의 변화고 또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주소체계를 갖추고 있다 하는 점도 참고로 말씀을 드립니다.


정관용-이거 왜 하는 겁니까? 


유정복-이 도로명 주소를 하게 되는 것은 우선 지금 우리 지번주소라고 하는 것이 일제시대 때 토지 수탈 목적으로 했던 주소 체계고 이게 한 100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상의 우리가 알기 쉽게 주소를 찾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써와서 그렇게 익숙해 있을 뿐이지 그래서 모든 OECD의 선진국들이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도로와 건물에 따라서 주소체계를 정비해 놓고 있거든요. 그래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생활이 편리해지고... 찾아가기 쉬울 뿐만 아니라 모든 행정의 주소 체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 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편물도 그렇고 또 어떤 민원 처리도 그렇고. 그래서 이것은 전세계가 다 해야 되는 당연한 겁니다. 우리가 너무 늦었고 지금 일본을 제외해 놓고 OECD 국가가 다 하고 북한까지도 도로명 주소를 하고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했다. 도로명 주소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또, 각종 물류비용도 줄이고, 응급구조 시에 쉽게 대처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유 장관은 "내년도 전면 시행될 때는 (그런) 혼란은 없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다. 과연 그런가? 도로명주소가 시행된 2014년 현재 유 장관의 호언장담은 그대로 실현이 됐을까? 



- <문화일보>에서 발췌 - 


같은 洞만 4년.. 베테랑 택배사원도 새 주소 캄캄 <조선일보>

서울시민 10명 중 7명, 자기 집 도로명 주소 몰라 <조선일보>

[갈팡질팡 새 도로명 주소] 전국 도로명주소에 '문화' 513번 등장.. 서울 중구~경기도 파주 47km가 '통일路' <조선일보>


안타깝게도 <조선일보>마저도 새 주로를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설 대목을 앞두고 택배 기사들은 한숨만 내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지번 주소 체계에서는 번지수만 봐도 가장 빠른 이동 루트가 바로 계산됐는데, 도로명 주소는 길도 여러 동에 걸쳐 있고 일방통행이 많은 골목길 사정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시간 낭비가 크다"는 것이 베테랑 택배 기사의 말이다. 당연히 배달에 걸리는 시간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근무 시간과 강도가 이전에 비해 훨씬 늘어난 셈이다. 



- <조선일보>에서 발췌 - 


문제는 또 있다. 전국 도로명 주소에 중복되는 명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역시 <조선일보>에 따르면 전국 도로명주소 16만 3195개 중에서 '문화'라는 이름이 들어간 곳은 무려 513곳이나 됐다고 한다. 또, '평화'는 334개, '통일'은 170개, '태평'은 144개, '희망'은 103개였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국도 1번 길에 포함되는 '통일로'는 무려 47km(서울 중구~경기도 파주)나 되기 때문에 이 곳에서 특정 주소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에 가깝다. 



- <노컷뉴스>에서 발췌 - 


새주소, 기득권에 발목 잡히다 <노컷뉴스>


물론 도로명주소 체계가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편리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CBSi The Scoop'의 김정덕 기자는 도로명 주소에 대한 사전 정보를 습득하고서 충무로 지역을 도로명주소로 찾아갔던 경험담을 제시했다. '주소를 알고 있어도 찾아가는 방법을 몰라 물어물어 가야 했던 지번 주소와는 달리 아주 쉽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일선 공무원들은 도로명주소를 쓰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도로명주소를 시행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있다.


필자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안행부의 공무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도로명 주소에도 이점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비해 편리한 구석이 있을 것이고, 효율성과 합리성을 따졌을 것이다. 문제는 제대로 된 홍보 없이, 도로명 주소를 시행하면서 벌어진 각종 혼란 등에 대해 아무런 준비와 대책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 측에서는 각종 물류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장 나타나는 결과는 완전히 정반대다. 시행 초기의 혼란일 뿐이라고 넘기면 그뿐일까? 


도로명 주소와 관련해서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는 "미국과 영국처럼 도로명 주소를 사용해온 국가들은 애초에 '동(洞)' 개념이 없이 도로를 중심으로 생활권이 형성됐다. 지금까지 동 단위로 위치를 가늠해 온 우리 국민들이 도로명 주소에 익숙해지려면 짧게는 10년, 길게는 한 세대(30년) 넘는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헌법 


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69조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도로명 주소 탓 전래지명 사라질 위기" <한겨레>


사실 익숙하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오류나 착오가 있는 부분은 수정을 해나가면 될 일이다. 조 교수의 말처럼 짧게는 10년, 길게는 한 세대가 넘는 적응 기간이 걸리는 엄청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적응이 된다는 점은 사실이다.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드는 일이라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 SBS 에서 발췌 - 


필자가 박근혜 정부가 도로명 주소를 도입하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이 정권이 '보수' 정권이 맞는가, 하는 것이었다. 보수(保守)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고 하는 태도'이다. 놀랍게도 박근혜 정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시키려는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한국지명학회 손희하 회장은 "도로명 주소 사업 시행으로 겨레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전래 지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런 시점에 지명학회를 이끌게 돼 더욱 어깨가 무겁"다면서 "새 도로명 주소는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되는 문화 향유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일제가 만든 주소 체계를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가 지명을 바꾸기 전에 존재했던 우리 고유의 지명마저 거세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마을 이름을 주소로 쓰지 않으면 단을단위의 문화 전통이 끊기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기존의 전남 진도군 금갑리는 웰빙길로, 경기 파주시 금승리·덕은리는 엘씨디길로, 서울 열등포구 대림동은 디지털로로, 울산 북구 연암동은 모듈화사업로로 바뀌었다. 기존의 지명들은 모두 역사적 유래와 전통이 담겨져 있는 것들이었다. 가령, 금갑리라는 이름은 금갑진성 아래에 붙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고, 금승리는 '쇠를 팔던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도로명 주소가 쓰이게 되면서 고유의 지명들이 죄다 사라지게 된 셈이다. 그 자리를 괴상한 외래어가 채우게 됐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헌법 9조와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한다는 대통령의 선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도대체 왜 이토록 성급한 것일까? 전면시행을 해서 전국적인 혼란을 가져올 것이 아니라 일부 지역부터 차근차근 시행했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효율성을 따진다고는 하지만, 전통적인 지명들을 무차별하게 없애야 했을까? 국민의 여론을 더욱 신중히 살피고, 의견을 수렴해서 오류와 착오를 최소화하고 불편을 줄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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