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슬로우 비디오>, 지루(?)한 이 영화가 좋다!

너의길을가라 2014. 10. 9.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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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비디오>는 이상한 영화다. 전형적이지 않다. 코미디 영화가 취하는 일정한 공식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이쯤이면 나올 법한 슬랩스틱이 없고, 특정 장면에서 뻔히 예상되는 무리한 개그가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싱겁고, 어떤 때는 심각할 정도 무미건조하다. 조미료가 없는 영화, 그것이 바로 <슬로우 비디오>의 정체다.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요즘 눈이 피로하더라. 세고 빠른 영화들이 많더라. 그런 추세에 '슬로우 비디오'의 등장이 장점이지 않을까" (차태현)


<슬로우 비디오>에 대한 입소문에는 대체로 두 가지 흐름이 있다. '보기 드문 착한 영화'라 는 극찬(極讚)과 '지루하고 밋밋한 영화'라는 혹평(酷評)이 그것이다. 우선, <슬로우 비디오>가 착한 영화라는 호평은 반박하기 어렵다. 피[血]와 욕설이 난무하는 타(他) 영화들에 비해 <슬로우 비디오>에는 고작 몇 번 정도 애교 수준의 욕이 나올 뿐이다. 12세 이상 관람가답게 과도한 폭력 장면도 없다.


그렇다면 '지루하고 밋밋한 영화'라는 평가는 어떨까? 봉수미 역을 맡은 남상미는 "요즘 영화가 빠르게 진행 돼서 그런 거지 우리영화는 정 템포로 가는 것이다. 빠른 템포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해명(?) 했다. 확실히 최근 영화의 흐름이 '빠르게 더욱 빠르게'로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장면 전환도 빨라졌고, 그에 따라 카메라 기법도 더욱 현란해졌다.




그에 비해 <슬로우 비디오>는 아주 평온하고 느긋한 호흡으로 일관한다. 영화를 보다가 졸았다는 관객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템포' 말고도 <슬로우 비디오>를 지루하다고 여길 요소들이 더 있다. 갈등 구조가 단순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슬로우 비디오>는 주인공 여장부(차태현)의 '보는 행위'에서부터 모든 사건이 비롯된다.


엄청난 동체시력을 가진 여장부는 세상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고, 20년 가까운 세월을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야만 했다. 그 런 그가 CCTV 관제센터 계약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고, 첫사랑이었던 봉수미를 찾게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슬로우 비디오>의 큰 줄거리다. 여러 갈등 구조를 넣어 시선을 분산시키지도 않고, 극을 뒤흔들만한 반전을 넣지도 않았다.


관객들은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세상의 속도 (혹은 늘 봐왔던 영화들의 속도)를 잊고, 그저 여장부의 시선을 따라 마음 편히 스크린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영화의 개연성이나 장면에 있어서의 유기적 연관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는 1시간 40분의 런닝타임을 위해 잘려나간 부분들이 꽤나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으니 이 정도는 살짝 눈 감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앞서 '조미료'가 없는 영화라고 설명했지만, 후반부에서 첨가한 약간의 산파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주된 소재인 CCTV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도록 하자. 영화에서는 CCTV가 여장부가 세상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보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끔 한다. '보는 것'은 곧 관심을 의미하지만, 어찌 보면 일방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여장부가 카메라라는 장치를 넘어서 실제로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모습들을 통해 <슬로우 비디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볼 때, 과도한 CCTV 설치로 인해 '감시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CCTV가 범죄로부터 시민들을 보호(실제로는 발생한 범죄의 후속조치에 불과하지만)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그려졌지만, '보는 것(시선)'은 곧 권력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밝은 영화를 계속 하면서 사랑받는 것이 기본적인 틀이에요. 하지만 변신까지는 아니어도 새로운 모습을 조금씩 보여드려야 그 틀이 더욱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지겹지 않겠어요?"


<엽기적인 그녀>에서부터 <과속 스캔들>, <바보>, <복면달호>, <헬로우 고스트> 등 차태현이 걸어온 길은 한결 같았다. 그는 항상 밝은 웃음을 줬던 배우, 따뜻한 감정을 선물했던 배우였다. 이제 그의 영화라면 '믿고 보는' 관객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난 것 같다. 그가 어떤 관점에서 영화를 선택하는지 관객들이 충분히 알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슬로우 비디오>는 10월 8일까지 관객 77만 명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어제 개봉한 영화들에 밀려 순위가 다소 하락했지만, 제목처럼 '천천히' 오랫동안 흥행을 하는 '착한 영화'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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