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이석기 내란음모 유죄, 전략의 부재는 아니었을까?

너의길을가라 2014. 2. 18.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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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판결을 존중한다. 대한민국 성숙한 법치주의를 확인시켜주는 이정표로 남기를 바란다" (새누리당)

"우리 사회의 시계바늘을 순식간에 40년 전으로 되돌리는 명백한 정치재판이자 사법살인" (통합진보당)

"국민상식에 반하고 시대 흐름과 동떨어진 위법행위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있었다" (민주당) 

"현직 국회의원이 내란 음모죄로 유죄선고를 받은 데 대해 다시 한 번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새정치연합)




- <연합뉴스>에서 발췌 - 


소치 동계 올림픽의 열기를 한순간에 식혀 버리는 판결이 내려졌다. 지난 17일, 수원지방법원 형사 12부(부장판사 김정운)는 이석기 의원에게 내란음모·선동, 국가보안법 위반을 인정하며 징역 12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1966년 김두한 의원 이후 48년 만이며,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로는 34년 만인 내란음모 사건은 '유죄'로 일단락됐다.


하나의 판결을 두고 정당들의 의견이 극명히 갈리고 있는 것처럼 누리꾼들도 이 사건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의견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분이 가능한 것 같다. 


1. 법관의 양심은 모두 어디 갔나? 나라가 독재화 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셈인가?

2. 사형이 아니라 고작 12년이라니! 검찰은 항소하여 반드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라!

3. 과대망상에 빠진 얼치기 회색분자가 내란은  무슨.. 그저 덜 떨어진 자일 뿐인데..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워낙 민감하고 뜨거운 사안이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번 판결을 전체적으로 차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통합진보당과 그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바랐던 것은 '국가보안법 유죄, 내란음모 무죄'였을 것이다. 물론 국가보안법에서도 무죄가 나온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 부분은 유죄가 나올 것이라고 이미 짐작됐던 바였기에 '내란음모 무죄'로 검찰에 한방 먹이는 그림을 그려왔을 것이다. 한편, '사형'을 들먹이는 극성적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정부와 새누리당 그리고 그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이번 판결에 내심 흡족하고 있을 것이다. 



- <연합뉴스>에서 발췌 - 


지난 6일, 공직선거법 및 경찰공무원 법 위반,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일련의 흐름이 형성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재판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까닭은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 청구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 때문이었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가 인정된 이상,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심판 청구도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디어스>가 인터뷰한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RO의 실체도 인정됐고 이석기가 그 총책임도 인정되었다. 이제 이석기가 통합진보당의 사실상의 ‘대장’이란 사실만 밝혀내면 통진당은 RO의 껍데기임이 입증되는데, 그건 심증으로는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이니 의외로 밝혀내기가 쉽지 않겠나"고 말했다고 한다. 


애초에 검찰이 '내란음모' 혐의를 들고 나온 것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무리수'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 유죄 판결이 나올 것일까? 단순히 통합진보당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권력' 때문일까? 물론 그러한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검찰이 이처럼 과감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뒤에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교안 장관의 뒤에는 누가 있겠는가?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실려 있는 것 아니겠는가? 법원의 입장에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설령 법원이 권력의 위세에 눌려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선 뭔가 '건덕지'가 있었을 것 아니겠는가?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가령 A라는 사람이 살인죄로 기소가 됐다고 해보자. 아무리 심증이 100%라고 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법원으로서는 유죄를 선고할 수가 없다. 따라서 검사 측은 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최대한 끌어 모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이 있거나 논리를 이끌어가기에 불리한 것들은 과감하게 쳐내야 한다. 반면, 피고인과 변호인은 그런 상황을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검사 측의 증거가 미진하다는 것을 집중 공략할 것이다. 이처럼 재판이란 재판은 검사와 피고인(+변호인) 간의 공방(攻防)이다. 당연히 '전략'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큰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즉, 재판의 논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 어느 부분에서 싸우고 어디에서 빠질 것인지, 전략적인 포인트는 어디인지.. 에 대한 '전략' 말이다.


혹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통합진보당과 변호인단의 '전략'에 문제는 없었을까? <미디어스>의 보도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일부 발췌한 내용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복수의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소속 이석기 의원의 변호인 측이 법정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한 기자는 "국보법이야 당연히 유죄가 나올 것이었고, 해당 회합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 행위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내란 음모는 아니라는 논점을 가지고 싸웠어야 했다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위법수집 증거로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에 치중했고, 피고인들은 녹취록이 허위며 날조라고 우겼다. 결국 검찰 측이 깔끔한 음성 파일을 제출하여 녹취록에 나온 낱말의 상당수를 확인하자 이석기 측은 궁지에 몰렸다는 설명이다.


'이석기 내란음모' 유죄, 지방선거 앞둔 야권 '타격' <미디어스>


이번 재판에서 이석기 의원 측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녹취록의 증거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녹취록을 인정하되 그 내용을 두고 다투는 것이다. 우선, 녹취록의 증거능력을 두고 전선(戰線)을 펼치면 재판은 아주 간명해진다. 만약 녹취록이 위법수집 증거로 인정돼 증거능력이 없다고 입증되면 '무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녹취록이 증거로 인정되면 상황은 매우 곤란해진다. 올인하다시피 했던 전방이 무너지면 속절없이 밀리게 되는 것이다.



- <뉴시스>에서 발췌 - 


실제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 측은 녹취록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첫 번째 전략을 선택했다. 지난 2013년 9월 2일, 통합진보당의 홍성규 대변인은 "녹취록이라고 우기는 '국정원 괴문서'는 날조에 가까울 정도로 왜곡 조작된 문서다, 이 괴문서를 증거로 하는 내란 조작 사건도 날조 모략극이다"고 주장했다. 8월 30일, "이석기 의원의 어떤 발언에도 내란 음모에 준하는 발언을 존재하지 않는다, 국정원은 일부 참가자들의 발언에 대해 문제 삼고 있다"고 말했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입장이었다. 이는 녹취록 전문이 공개되면서 더 이상 녹취록의 존재 자체, 혹은 발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녹취록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음을 의미한다.


檢 "RO는 민혁당과 유사 조직" vs 李측 "국정원이 녹취록 조작" <서울신문>, 2013. 11. 13.


이석기 의원의 변호를 맡은 김칠준 변호사는 사건을 맡던 당시부터 "국정원이 증거로 제시한 비밀회합 녹취록은 증거 능력이 없고, 지하혁명조직으로 규정한 'RO'라는 조직도 실체가 없다. 이번 사건은 무죄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또, 2차 공판준비기일이 열리던 당시(2013년 10월 22일)에도 "이 의원 등 피고인들은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국토를 참절할 목적이 없었고 내란음모 또는 선동 행위를 한 사실 자체가 없다. 검찰의 공소사실이 모호하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결국 '녹취록의 증거능력'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 봐야할 것이다. 이에 법원은 변호인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검찰 측에 "변호인단이 부동의한다면 증거조사를 위해 70시간 분량의 녹취파일을 모두 재생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입증계획을 수립하라"는 요구를 했었다고 한다.


"피고인들은 내란 모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존립과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실질적이고 명백한 위험을 초래하였는바 그 죄책이 몹시 무겁다 할 것이므로 피고인들을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들은 혁명의 결정적 시기를 준비하면서, 정당, 대중조직, 나아가 국회에까지 침투하여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을 주체사상과 대남혁명론으로 유혹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왔으며, 혁명의 완수라는 미명 하에 조직원들로 하여금 상부의 지시를 철저히 관철하도록 교육해왔다"


내란음모 사건 1심 판결문 요지 <연합뉴스>




- <경향신문>에서 발췌 - 


결국 법원은 녹취록의 증거능력을 인정했고, "내란음모 사건을 처음 국가정보원에 제보한 이모씨의 법정 진술은 신빙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또, "지난해 5월 (곤지암, 합정동) 두차례 모임은 조직 모임으로 봐야 한다. 사상학습하는 소모임은 RO의 세포모임으로 봐야 한다. 이 의원 등이 혁명동지가와 적기가를 부르고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사실도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만약 녹취록의 증거능력 유무에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스>가 인용한 한 기자의 말처럼 '해당 회합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 행위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내란 음모는 아니라는 논점을 가지고 싸웠'다면 어땠을까? 물론 통합진보당이 지금껏 보여준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석기는 바보'라고 외치는 일에 동의할 것 같진 않다. (외치지 않는다고 바보가 아닌 것은 아닌데도..) 아쉬움은 남지만 결과적으로는 바뀔 수 없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애초부터 어긋났던 통합진보당의 대처가 화를 불러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우선, 통합진보당은 자신들의 진짜 정체성을 숨긴 채 각종 선거에서 유권자들이게 표를 요구해왔다. 유권자들은 통합진보당의 핵심 세력(이든 아니든)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들이 저 정도로 황당무계한 수준인지 모른 채, '노동자(그래봤자 일부 강성 노조를 대변한 것이지만)를 위한 정당'이라는 겉모습만 믿고 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기만'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한 모습들이 누적되면서 다수의 국민들은 차츰 통합진보당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었다. 재판의 결과, 그것이 내란음모에 해당하는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통합진보당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도 딱히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통합진보당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상황 역시 녹록치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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