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수험생 인생 바꾼 세계지리 8번, 교육당국의 아집이 낳은 비극

너의길을가라 2014. 10. 1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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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논란의 '세계지리 8번' 문항을 한번 쭉 살펴보도록 하자. 아래에 보이는 문제가 약 1년 동안 1만 9,000명의 수험생들을 극도의 고통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정답 없는 문제'이다.



지난 16일, 서울고법 행정7부(민중기 수석부장판사)는 A씨 등 수험생 4명이 "세계지리 과목 8번 문항에 오류가 있다"며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부(장관)를 상대로 낸 대학수학능력시험 정답결정 처분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사실상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교육부 장관에 대한 청구가 "수험생들에게 내린 처분이 없다"며 각하 됐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전체적인 판결(원고 승소)에 큰 의미는 없다.


같은 문제를 두고 1심 판결과 2심 판결은 왜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2013년 12월 16일에 내려졌던 1심 판결을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반정우 부장판사)는 "질문이 다소 애매하더라도 평균 수준의 수험생이 풀 수 없을 정도는 아니며 문제 자체가 틀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렇게 판단한 논리적 이유를 짚어보도록 하자.


▶ 1심 판결 내용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반정우 부장판사), 2013년 12월 16일]


1. 8번 문제에서 ㉠지문은 명백히 옳고 ㉡,㉣지문은 명백히 틀렸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정답을 고르면 2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평균 수준의 수험생이 정답을 고르는 데 어려움이 없다.


2. 세계은행과 유엔 발표자료로는 2010년 이후는 NAFTA가 총생산액이 더 많았지만 그 이전에는 EU가 더 많았다. 이 사건 지문은 시기에 따라 옳거나 틀린 지문이 될 수 있을 뿐 어떤 경우에도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3. 해당 문제의 다른 지문도 연도와 무관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인 점 등을 고려하면 해당 문제에 2012년이라는 표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를 기준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볼 수도 없다.


당시 1심 재판부가 주목한 것은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었다. ㉠이 명백히 옳고, ㉡,㉣이 명백히 틀렸기 때문에 '애매한' ㉠과 함께 답으로 골라 2번을 선택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오류 여부를 판단하기보다는 답을 고를 수 있으냐 없느냐에 초첨을 맞춘 것이다. 다소 의아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논란의 핵심이었던 ㉢ 에 대한 설명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제에 나온 지도에 표시된 연도는 분명 2012년이다. 이는 문제를 푸는 수험생의 입장에서 판단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포인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해당 문제에 2012년이라는 표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를 기준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볼 수도 없다'는 해괴한 답을 내놓았다. 이쯤에서 '제대로 된' 2심 재판부의 판결 내용을 확인해보자.


▶ 2심 판결 내용 [서울고법 행정7부(민중기 수석부장판사), 2014년 10월 16일]


1. 실제 2010년 이후의 총생산액 및 2007년부터 2012년까지 평균 총생산액이 유럽연합(EU)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더 크므로 평가원이 맞다고 본 ㉢ 지문은 명백히 틀리다.


2. 8번 문항의 옳은 지문은 ㉠지문밖에 없으므로 정답이 없다. 문제 자체의 오류로 인해 2012년 기준 NAFTA와 EU의 총생산량의 차이를 알고 있는 수험생들이 그 문항이나 답항의 의미 파악과 정답항의 선택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다.


3. (지도에 표시된 '2012년'이 8번 문항을 해결하는 기준이 되는지 여부에 대해서) 출제된 문제의 질문, 제시문, 정답의 답항 내용을 종합하면 모두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실에 부합해야 하므로 따로 예외를 표시하지 않는 이상 제시문은 질문과 함께 문제를 구성해 답항을 정답으로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답을 도출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던 1심과는 달리 2심은 문제의 오류 여부에 대해 집중했다. ㉢이 명백히 틀리기 때문에 옳은 지문은 ㉠지문밖에 없으므로 정답이 없다는 결론이다. 또, 지도에 표시된 2012년이 문제를 푸는 데 기준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제시문(지도에 표시된 2012년)은 질문과 함께 문제를 구성해 답항을 정답으로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명쾌한 답을 내렸다.


지금까지 1심 판결과 2심 판결을 차례대로 살펴봤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1 심의 판결은 사실상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주장을 고스란히 답습한 것에 불과했다. '이것이 틀리기 때문에 저것이 답이다'라는 식으로 문제를 출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에는 분명한 답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문제를 풀 때 반드시 ㉠부터 확인하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이 먼저 눈에 들어온 수험생은 당연히 ㉢에 'X'표시를 하지 않았을까?



"세계지리 과목 8번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판결이 내려지긴 했지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법원의 판결문을 받아 내용을 분석하고 있는 중이며, 분석이 끝나는 대로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이라고 밝힌 만큼 최종심을 기다려봐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 판결이 다시 뒤집힐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지리 8번으로 인해 피해를 봤던 학생들이 '잃어버린 3점'과 그로 인해 본 피해(재수 혹은 하향 지원 등)를 깨끗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또, 소송의 결과가 당사자 사이에만 미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소송은 제기할 수 없다. 따라서 등급조정이 가능한 수험성은 최대 22명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신적 손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민사상 손해배상청구소송 쪽으로 방향이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여전히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부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잘못'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세계지리 8번' 논란은 이미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었다


교 육당국은 '교과서대로 냈다', '절차상 하자가 없다'는 등의 경직된 입장으로 일관하다 어제 발표까지 밀어붙였다. 더욱이 어제 발표에선 정오표의 잣대를 내미는 대신 '최선의 답'이란 희한한 설명을 했다. 교육당국엔 '교과서 근본주의자'들만 우글거리는 것인가. 현행 교과서의 오류를 피해가는 지혜를 발휘하기는커녕 대학 입시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고집만 부리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교육당국은 '열차는 떠났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하지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자충수를 둔 것은 아닌지 자성해야 할 시점이다.


수능 오류 논란에 눈감은 교육당국, 뒤탈 없겠나 <세계일보>, 2013년 11월 26일


수능 시험이 끝나면 문제 및 정답에 대한 이의 신청을 받게 되어 있다. 당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세계지리 8번'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이의제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했다. 또, 외부의 이의제기 말고 이미 내부에서도 지적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당시 교차검토 위원으로 참석했던 A씨는 "수능을 한 달 앞두고 10월에 열린 교차검토 과정에서 세계지리 8번 문항에 대한 지적이 나왔었다"고 밝혔다.


그나저나 이의신청에 대한 심사가 제대로 이뤄지긴 하는 것일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아무 문제 없다'고 당당히 밝혔지만, 2013년 12월 5일(당시) 민주당 박홍근 의원이 '수능 이의신청 및 심사집행내역'을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세계지리와 한국지리 문항과 관련해 제기된 이의신청 14건을 심사위원 15명이 2시간 동안 심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항당 평균 심사시간을 환상하면 고작 8분 30초에 불과했다.



'우리가 문제를 잘못 냈다'고 인정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을까? 한 국교육과정평가원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수많은 학생들의 인생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당시에 출제 오류를 바로잡았다면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고, 각자 자신의 점수에 맞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한 국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부가 피해를 본 학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보상 대책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진정어린 사과를 하는 것이 첫 번째다. 물론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상고'를 하겠다는 저치들에겐 너무 과한 요구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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