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서사는 버린 채 콩트만 남은<서부전선>, 지루해서 미안해

너의길을가라 2015. 9. 2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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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영화관까지 찾아가서 본 영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내가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함일까? 돈과 시간을 투자한 영화가 조촐한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영화관을 돌아서는 발걸음이 참 쓸쓸하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합리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서부전선>은 그런 류의 영화다.



"찍은대로 나온 것 같다. 솔직히 빈 구석도 있는데 그래도 시대 배경에 맞는 영화가 나온 것 같다. 어리바리한 배우들이 어리바리한 감독과 어리바리한 영화를 찍었다. 웃음도 있고 감동도 있다. 천성일 감독이 언론시사회 때 '전쟁엔 해피엔딩은 없다'는 말을 했다. 그 메시지가 딱 담긴 영화인 것 같다. 코미디 같지만 비극도 있는 영화다. 사실 사람이 사는 모습 자체가 어떻게 보면 코미디이지 않나. 그런 게 담긴 것 같다." (설경구)


단도직입적으로 <서부전선>은 단조롭다. 그래서 지루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익숙하다. 전쟁이 한창인 기간에 남과 북의 군인이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된다는 설정은 <웰컴 투 동막골>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웃기고 싶어 안달이 난 이 '코믹'스러운 영화는 갑작스럽게 '감동'으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이제부턴 <고지전>이 시작된다. 


영광(여진구)은 탱크를, 남복(설경구)은 비문(秘文)을 갖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두 사람은 주도권을 주고받으며 지긋지긋한 갈등을 반복한다. 만약 천성일 감독이 6·25 전쟁의 피로감을 영화 속에 고스란히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이 지루함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코미디는 부실했고, 감동은 과잉으로 치달았다. <동막골>과 <고지전>에 각각 못 미친 셈이다.




<서부전선>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두 번째 이유는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이다. '단편' 수준의 이야기를 엿가락처럼 늘여놨으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하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분량을 늘이기 위해 중간 중간 삽입된 에피소드들은 작위적일 뿐만 아니라 딱히 매력적이지 않다. 예상되는 타이밍마다 어김없이 회상 신이 등장하고, 그 내용도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화가 두 명의 주인공에게 어떤 최후를 만들어 놓았을지, 설경구가 또 한번 '절규'의 연기를 보여줄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이 된다. 그렇다. <서부전선>은 예견가능성의 범위를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진구의 존재이지만, 캐릭터 자체가 입체감을 가지지 못한 탓에 그의 노력은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물론 <서부전선>의 메시지가 전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남복과 영광에게 '이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가족'이고, 돌아갈 '집'이다. 다시 말해서, <서부전선>은 전쟁의 의미에 대해 되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돌아갈 집이 없어지는데 전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져 묻는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복과 영광이 형님아우 하는 사이가 되어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은 결국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전쟁이라는 틀 속에서 '아군'과 '적군'으로 피아 구별이 되기 이전에 평범한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도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이유도 모른 채' 상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전쟁터에 처하게 되는 참혹함이야말로 전쟁의 본질 아닌가?


영화 칼럼니스트 이학후는 "영화를 이념적 프레임으로 재단하는 것에 피로감이 크다. <서부전선>은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한국전쟁을 영화적 소재로서 다루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은 이미 <웰컴 투 동막골>과 <고지전>이 열어두지 않았던가? 서사는 버린 채 모양을 조금 바꾼 채 반복되는 콩트로 연명하는 <서부전선>은 함량미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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