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여행기

[버락킴의 동유럽 여행기] 8. 드레스덴, 평화를 상징하는 그곳에 가길 잘했다

너의길을가라 2017. 5. 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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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를 훑어본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체코의 다른 소도시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가령, 플젠(Plzeň)이나 체스키 크룸로프(Ceský Krumlov) 같은 곳 말이다. 만약 내가 맥주를 좋아했다면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의 본고장인 플젠을 선택했을 테고,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힐링'을 하고 싶었다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1992년)으로 지정돼 있는 체스키 크룸로프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솔직히 후자는 끌리긴 했다. 


드레스덴 중앙역(Dresden Hauptbahnhof)


하지만 당시의 우선순위는 체코의 다른 소도시가 아니었다. 바로 두 번째 선택지, 인근의 다른 국가(의 분위기)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독일 작센(Sachen) 주의 주도(主都)인 드레스덴(Dresden)은 최적의 장소였는데, 프라하에서 약 2시간 거리(플젠은 1시간, 체스키 크룸로프는 약 3시간)로 당일 코스로 여행하기 딱 좋았다. 교통 수단은 기차든 버스든 별다른 차이가 없다. 편한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 어차피 드레스덴 중앙역(Dresden Hauptbahnhof)까지 버스가 운행되고, 돌아올 때도 중앙역 인근의 버스 정류장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왕복 버스 티켓


나의 경우에는 오스트리아 빈(Wien)으로 이동할 때 기차를 이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드레스덴까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 유명한 스튜던트 에이전시(Student Agency) 버스를 이용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더니 버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있었다. 소요 시간은 1시간 55분. 가격은 300코루나(한화로 약 13,800원)였다.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구시가까지는 도보로 15분~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구시가 쪽으로 나 있는 큰 도로를 따라 걸으며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다보면 금세 첫 번째 명소인 크로이츠 교회(Kreuzkirche)가 나타난다.


드레스덴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연관 검색어가 있다. 첫 번째는 나폴레옹(Napoléon)의 드레스덴 전투(Battle of Dresden, 1813. 8. 26~27)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와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Karl Philipp Fürst zu Schwarzenberg)이 지휘한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러시아 동맹군이 작센 공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의 외곽에서 벌인 전투로, 나폴레옹이 기동성을 앞세워 승리를 거뒀는데, 이는 그가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둔 싸움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드레스덴 폭격(bombing of Dresden)이다. 연합군, 정확히는 영국 공군 (RAF) 소속 중폭격기 722대와 미국 육군 항공대 (USAAF) 소속 중폭격기 527대가 1945년 2월 13일부터 사흘 동안 4차례에 걸쳐 드레스덴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 소이탄 65만 개와 3,900개의 고폭탄이 투하됐다. 도심은 초토화됐고, 7만 8,000채의 집이 파괴됐다. 폭격 후 시 당국은 공식 보고서를 통해 전체 사망자 수가 약 2만5000명이라 발표했다. '숲속의 사람'이라는 뜻(슬라브 어)의 드레스덴은 철저히 붕괴됐다. 


드레스덴 시의회(City council City of Dresden)


아마 몇 년 전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연관 검색어'가 떠올라야겠지만, 이젠 '드레드센 선언(Dresden Declaration)'이 아마 1순위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3월 28일 드레스덴의 공과대학교에서 발표한 대북 3대 제안, 정확히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 말이다. '드레스덴 선언'이 지금의 엄청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박 전 대통령이 '읽었던' 드레스덴 연설문이 최순실 소유의 태블릿 PC에서 발견됐고, '수정'한 흔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통일부는 "최순실의 개인적 구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지만, 이러한 반박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길이 부드러울 리 없다. 또, '통일은 대박'이라는 문구가 최순실의 작품이라는 장시호의 주장도 이러한 '찜찜함'을 더욱 짙게 만든다. 이처럼 최근에는 '드레스덴'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드레스덴 선언?', '최순실?' 이라는 연상 과정이 자연스레 진행되는 터라 '드레스덴'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웃음거리가 되기엔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고, 또 그 아픔을 이겨낸 아름답고 강한 도시인데 말이다.





괜히 그곳의 별명이 '독일의 피렌체'이겠는가. 이제부터 드레스덴에 덧씌워진 멍에를 걷어내보도록 하자. 드레스덴 여행의 출발점인 중앙역은 구시가(알트슈타트, aldstdat)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참고로 '드레스덴 선언'이 발표됐던 드레스덴의 공과대학교는 중앙역의 아래쪽에 있다. 굳이 가볼 이유는 없을 듯하다. 알트슈타트로 뻗어 있는 프라거 거리(Prager strabe)를 따라 걷노라면, '체코'와는 확연히 다른 '독일'만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다.


크로이츠 교회


상점(맥도널드도 있다)과 은행 등이 즐비한 거리를 5~10분 정도 걸었을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은 시간을 금세 흘려 보낸다. 이윽고 카를(칼)슈타트 백화점(Karstadt Department Store)이 보이고, 큰길을 건너면 눈앞에 제법 큰 건물들이 시야를 압도한다. 드레스덴 시의회(City council City of Dresden)와 크로이츠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면적이 4,800㎡에 달하는 대성당(Katholische Hofkirche)이 작센 주 최대의 '가톨릭' 교회라면, 크로이츠 교회는 작센 주 최대의 개신교 교회다. 3,000석 규모라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엄청난 크기의 크로이츠 교회를 지나면 약간의 혼란이 온다. 왼편으로는 대성당, 츠빙거 궁전, 레지던츠 궁이 위치해 있고, 오른편으로는 프라우엔 교회와 알베르티눔 등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부터 가야 하지?' 배부른 고민이자 행복한 갈림길인데, 어떻게 동선을 짜는 게 가장 효율적일지는 역시 개인의 취향에 맡길 수밖에 없다. 우선, 프라우엔 교회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오른쪽 끝에 있는 알베르티눔(Albertinum)은 관람을 하려면 제법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점심을 먹은 후 천천히 구경하기로 하자.



바로크 양식의 대표격(바로크 양식의 대가로 불린 게오르크 베어가 설계)인 프라우엔(=성모) 교회는 드레스덴을 소개하는 사진으로 많이 채택되곤 하는데, 그만큼 아름다운 외양을 지녔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됐다가 1994년에야 복원이 시작됐고 2005년 완공됐다. 복원이 늦게까지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교회의 표면이 얼룩덜룩한 건 폭격 후 남은 파편을 찾아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라우엔 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 앞에 수직으로 세워진 대형 버스 3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뭐지?' 가지고 있던 여행 책자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2월 6일에 세워졌으니 반영될 리가 없었다. 구조물 앞의 설명을 천천히 읽어보고, 인터넷을 검색해가면서 정보를 취합했다. 그제야 이 버스들이 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 알게 됐다. 시리아 출신 예술가 마나프 할부니의 작품으로 제목은 '모뉴먼트(Monument)'. 




"알레포에서는 폭격을 막기 위해 버스를 이 같이 세워 길을 봉쇄하기도 한다. 알레포의 고통을 상징한다. 드레스덴은 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됐다가 재건된 도시이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알레포가 드레스덴처럼 재건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나프 할부니)


시리아의 알레포는 내전의 최대 격전지였고, 그로 인해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다. 정부군과 반군은 2012년 7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무려 4년 반 동안 전투를 벌였다. 알레포가 반군의 주요 거점지였던 만큼 정부군은 이 곳을 탈환하기 위해 무자비한 공격을 단행했다. 특히 정부군의 저격수가 쏘는 총알은 알레포 시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알레포의 거리에 버스 3대가 세워졌다. 거리를 봉쇄해 저격수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나프 할부니는 이 끔찍한 참사에 착안해서 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 앞 광장에 버스 3대를 세운 것이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재건의 도시 드레스덴처럼 알레포 역시 그러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지역사회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극우단체는 마나프 할부니의 작품을 전시토록 허가한 드레스덴 시장 디르크 힐베르트를 협박했다고 한다. 극우단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 조형물은 오는 11월까지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전범 국가이나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한 독일, 그리고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에 의해 파괴됐다가 재건된 아픔을 지닌 드레스덴, 그 도시의 한 가운데 시리아 내전의 참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세워진 구조물. 이를 설치토록 한 시장과 수용한 시민들, 이를 반대하고 나선 극우단체들. 많은 스토리들이 혹은 여러 갈등들이 목격됐지만, 그럼에도 '모뉴먼트(Monument)'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세계에 보여주고 있었다. 또, 드레스덴이 평화와 통일의 도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드레스덴을 마저 여행하고 어두워진 밤에 다시 버스를 타고 프라하로 돌아가면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곳에서 얻어야 했던 것,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모두 끌어안고 돌아가는 것 같다고. 드레스덴에 참 잘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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