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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인가 예외인가? 박태환의 운명은? 대한체육회의 결정은?

너의길을가라 2015. 3. 2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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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물살을 가르며 질주하던 그를 기억한다. 2007년 호주 맬버른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 호주의 수영 영웅 그랜트 해켓을 제치고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박태환은 한국 수영 선수 가운데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서 1위를 차지했다. 수영 불모지(不毛地)나 다름없던 대한민국에서 박태환은 자부심이었다. 스포츠의 국가(민족)주의화는 우려의 대상이지만, 박태환이 국민들에게 주었던 감동은 매번 우려를 넘어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자유형 400m 금메달, 자유형 200m 은메달을 차지하며 다시 한번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박태환은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결승 진출 실패를 경험하며 삐끗했다. 하지만 박태환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고, 보란듯이 부활에 성공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그는 자유형 세 종목(100m · 200m · 400m)을 석권했고, 2011년 상하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자유형 400m에서 우승했다.

 

선수 생활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마지막 무대를 준비 중이던 박태환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지난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받은 도핑테스트에서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엄격하게 금지하고 약물이자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성분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박태환이 금지 약물을 사용했다니!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수영계뿐만 아니라 전국민은 충격에 휩싸였다.

 

ⓒ SBSfunE

 

박태환 측은 즉각적으로 금지 약물 사용의 고의성을 전면 부인하면서, 소변 검사에서 테스토스테론 성분이 검출된 이유는 지난해 7월 말 서울 중구 T병원에서 맞은 '네비도(nebido)' 주사제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걱정의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박태환이 고의적으로 그랬을 리 없지'라고 안도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지난 24일, 국제수영연맹(FINA)은 청문회를 열어 박태환에 대한 징계를 논의했다. 약 4시간 동안 진행된 청문회에서 박태환은 자신에게 고의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테스토스테론이 포함된 '네비도' 주사 투약은 부작용과 주의사항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도핑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 병원 측의 과실이었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 등의 자료들도 제출됐다.

 

 

하지만 국제수영연맹은 결정은 단호했다. 박태환은 18개월의 선수 자격정지 징계를 받게 됐다.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데스토스테론 검출에 대해서 무관용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데, 설령 고의성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선수에게는 금지 약물에 대해 주의하고 예방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박태환이 예외일 수는 없었지만, 일반적인 징계가 2년인 점을 미뤄보면 어느 정도 감경(減輕)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체육철학자 김정효 박사(서울대 강사)는 국제수영연맹의 이번 징계에 대해 "박태환을 봐준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도핑 규율은 엄격할수록 기강이 서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태환은 수영계에서 워낙 거물이고 아시아 수영을 대표하는 상징성이 크다. 징계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박태환에게 징계를 내리면서도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는 있게 했다. FINA로서는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얻었다"고 평가했다.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레 초점은 박태환의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 여부에 맞춰졌다. 국제수영연맹이 내린 징계인 18개월 선수 자격정지만 놓고 보면, 박태환은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금지 약물을 복용해 징계를 받은 선수는 징계 만료일로부터 3년 동안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대한체육회의 국가대표 선발 규정 제5조 제6호가 걸림돌이다. (2014년 7월 15일 신설)

 

여론은 대한체육회의 규정을 두고, '박태환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쪽과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쪽으로 갈라졌다. 양측의 의견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 기회를 줘야 한다는 동정론을 제기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박태환의 옛 스승인 노민상 전 국가대표팀 감독인다. 그는 "처벌은 FINA 징계로 끝내고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선수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면서 "박태환이 한국수영 발전에 이바지한 게 많은 만큼 선수 자신이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다면 풀어주는 것이 좋은 방법 같다"고 말했다.

 

물론 박태환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단순히 '동정론'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대한체육회의 규정이 '이중 처벌'이라는 문제제기도 포함되어 있다. 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지난 2011년 미국올림픽위원회가 '금지약물 복용으로 6개월 이상 징계를 받은 선수는 다음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게 한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은 잘못이라는 판단을 내린 적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체육회의 규정도 '이중처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구글 이미지 검색 -

 

하지만 여론의 반응은 박태환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박태환'이 아니라 '원칙'을 어기는 '예외'의 잦은 출현에 거부감이 있다. 돈과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이름값에 따라 엿가락처럼 휘는, '원칙'을 무시하는 '예외'에 대한 불쾌감이 존재한다. 박태환의 공로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과 박태환을 위한 예외를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 개인을 위해 원칙을 어기는 것은 사회적 정의에 반할 뿐만 아니라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실제로 2014년 5월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김지현은 의사가 처방해준 감기약을 복용했다가 도핑테스트에 적발돼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로부터 자격정지 2년의 징계를 받은 바 있다. 의사를 고소한 박태환의 케이스와는 달리, 김지현의 경우는 담당 의사가 청문회에 직접 출석해서 과실을 인정하는 한편 선처를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무관용 원칙'은 약자에겐 더욱 단호한 법 아니겠는가? (만약 그가 박태환이었다면..엇갈린 두 수영 선수의 운명 <KBS>)

 

KBS

 

재미있는 것은 박태환에 대한 국제수영연맹(FINA)의 징계가 18개월로 결정되자,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는 "FINA가 박태환에게 적용한 근거가 김지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면 선수가 원하는 경우에 한해 징계 수위를 조정할 수 있다"고 밝히며 사전작업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정작 김지현은 선수 생활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지난 23일 공군 훈련소에 입대한 상황이다. 박태환을 살리기 위해 물신양면으로 나섰던 대한체육회가 김지현에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줬다면 애초에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김지현을 제쳐두고서라도 지난해 7월에 신설한 규정을 '박태환' 한 명 때문에 바꾼다는 것은 대한체육회의 위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에 손상을 가하는 자충수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설령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원칙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정의(正義)에 대한 사회적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바람직한 논의 방향은 ' 박태환을 잃더라도 제2의 박태환을 막아야' 한다는 쪽으로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만약 박태환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원칙에 대한 예외'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이중징계'에 해당하는 체육회 교정은 애초에 무효이기 때문에 이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논리적 전개가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원칙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지킬(따를)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현재 법무법인 바른 국제중재 · 소송팀의 윤원식, 톰 피난스키 변호사 등이 이런 이유로 "체육회는 국가대표 선발 규정 일부 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언론은 공은 대한체육회로 넘어 갔다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대한체육회의 결정 쪽으로 몰고 있다. (박태환의 '리우 도전', 대한체육회가 열쇠 쥐었다 <OSEN>, 박태환, 18개월 자격정지..'리우행' 열쇠는 체육회에 <JTBC>) 모르긴 몰라도,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어떤 결정을 하든 논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원칙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다면 법적 공방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예외를 두기로 한다면 정의를 희구(希求)하는 여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대한체육회의 결정이 참으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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