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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상류층의 속물근성과 그조차도 욕망하는 우리의 속물근성

너의길을가라 2014. 5. 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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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그 중에서 유력한 이론(혹은 가설) 중 하나는 바로 '언어결정론'이다. 훔볼트(Humbolt)가 이 이론의 대표적인 주창자이다. 훔볼트는 인간의 사고의 구조와 내용은 곧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사피어-워프는 "우리는 모국어가 그어놓은 선에 따라 자연세계를 나눈다"고 말했고, 비트겐슈타인도 "내 언어의 한계들은 내 세계의 한계들을 뜻한다"고 말했다.

 

'언어결정론'의 대척점에 '사고결정론'이 자리잡고 있고, 최근에는 '언어결정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 글에서 그 모든 이론을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 어떤 이론이 100% 옳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굉장히 밀접하고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 <엑스포츠뉴스>에서 발췌 -

 

'밀회'가 낱낱이 해부하는 상류층의 속물근성 <엔터미디어>

 

정덕현은 위의 글에서 <밀회>가 다루려 했던 것은 결국 스무 살 차이 이선재(유아인)와 오혜원의 사랑이 아니'라면서 결국 <밀회>가 표현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상류층의 속물근성'이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떠난다. 피아노를 실은 차가 뒤따른다. 전염병을 피하듯 고속도로를 피해서 달린다. 어느 작은 도시 귀퉁이에서 연주를 한다. 극장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좋은 점은 사람들이 속물근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연주를 들으러 온다는 것이다.'

 

오혜원의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리흐테르의 자서전은 상류층의 속물근성과 이를 비판하고자 하는 <밀회>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필자는 <밀회>의 비판의 칼날은 오로지 '상류층'만을 겨누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가아서 <밀회>가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상류층' 혹은 '상류사회'에 어떻게든 편입되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체 뭐 때문에..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냐'는 이선재(유아인)의 물음에 오혜원(김희애)은 이렇게 대답한다. "돈 때문이 아니다. 명성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상류사회의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거 하나로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고작 그것 때문에 청춘을 다 써버렸나?'고 묻고 싶지?"

 

'상류사회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욕망. 이는 오혜원의 삶을 지탱해온 욕망이었고, 동창인 친구를 벼랑 끝으로 모는 데 동조하는, 마작을 공부하면서 오혜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상류사회로 편입되는 꿈을 꾸는 왕비서(백지원)의 욕망이기도 하다. 또, 그 비루한 욕망은 곧 우리의 욕망이기도 하다. 감추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추악한 욕망이지만 무엇보다 강렬하고 지독할 만큼 끈질긴 욕망이기도 하다.

 

상류층 [上流層] - 사회적 지위나 생활 정도가 높은 사회 계층 

 

드라마에서도 쓰고 있고, 정덕현도 이를 그대로 옮기고 있는 '상류층'이라는 단어는 '사회적 지위나 생활 정도가 높은 사회 계층'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에 반대되는 말은 당연히 '하류층'이다. 상류층과 하류층을 나누는 기준, 즉 사회적 지위나 생활 정도를 가르는 기준은 결국 '돈'이다. 사람을 '상'과 '하'로 나누는 기준이 '돈'이라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돈을 많이 가진 그들이 '상류층'이라면 우리는 명백히 '하류층'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이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는 이런 괴상한 구분법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누리는 문화는 '상류문화'이고, 우리가 즐기는 것은 '하류문화'인가?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 실소유주 유병언 회장도 우리 사회의 '상류층'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상류사회 · 상류층에 대한 욕망의 근원에는 이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요란한 데코레이션이 한몫하고 있다. '상류'라는 말 자체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을 '상류층'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의 사회를 '상류사회'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향한 '욕망'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의 숙명과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언어결정론의 한계를 다시 지적하는 꼴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포장'하는 데 우리까지 동조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 그 자체다.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논외다. 그 이면의 추악함은 '돈'이 만들어낸 진한 향수에 묻혀 교묘히 감춰진다. 그 욕망을 좇는 것까지 탓하고 싶진 않다. 기실 그것은 우리 모두 갖고 있는 비루함이니까.

 

다만, 그 욕망에 '상류'라는 고급스럽고 예쁜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 그들은 우리 사회의 높디 높은 '상류'가 아니라 그저 돈이 많은 '부유층' 혹은 '졸부'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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