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레버넌트>, 복수로 시작해 인간을 이야기하는 다른 시선

너의길을가라 2016. 1. 2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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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타계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기존 미국사(史)의 시각과 방법론을 180도 뒤바꾼 기념비적인 책이다. 역사의 주인공이자 해석권을 지냈던 지배층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원주민 · 흑인 · 여성 · 노동자 등으로 채워넣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한 처절한 투쟁을 통해 미국사를 새롭게 바라본 것이다. 



특히 이 책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콤롬버스 일행이 원주민을 '사냥'하는 장면을 그 시작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15~16세기 유럽인들이 신항로와 신대륙을 발견하는 데 온힘을 쏟았던,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흔히 기록(기억)되는 시대를 '침략'의 역사로 해석하는 놀라운 관점의 전환을 이끌어낸 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게임(대항해시대 시리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에서부터 비롯해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각종 매체들은 대항해시대를 더욱 아름답게 채색했다. 하지만 관점의 전환을 통해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대항해시대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 굳이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무려 2,000만 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다.



"금광도 석유도 발견되기 이전의 시기이지만 이미 아메리카 대륙은 거대한 용광로였다. 미국, 캐나다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유럽 사람들이 모피 사냥을 위해 미국으로 유입됐다. 사냥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등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했다. 야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이 흥미로웠다. 나는 이런 곳에서 불행하게도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시작이 아닌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영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미국 서부 필라델피아 출신의 사냥꾼이었던 '휴 글래스(Hugh Glass·1780~1833)'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가 살았던 1823년의 아메리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항해시대'를 만들고, 그 시대를 가득 채웠던 유럽인들의 호기심과 도전 정신은 이른바 '개척의 시대'와 프런티어(frontier) 정신'이 대신했다. 


'황량한 서부(wild west)'를 향한 사냥꾼들과 유럽인들의 욕망은 더욱 부풀어올랐고,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사냥터로 바뀌어 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잘 표현된 것처럼 유럽인들과 원주민은 격렬히 대립했다. 유럽인들에게 개척의 대상이 된 황량한 서부의 원주민들은 제거해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반면, 이미 광활한 자연 속에 터전을 잡고 살아왔던 원주민들의 입장은 어떠했겠는가? 




"지금도 파푸아뉴기니나 아마존에서는 자본가들이 원주민을 쫓아내고 자원을 착취한다. <레버넌트>는 그런 일이 처음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을 보여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필요에 의해 프랑스인들과 타협(거래)을 하며 살아가는 아리카라 부족의 족장은 딸을 빼앗기면서 모든 백인을 적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비단 영화 속 아리카라 부족뿐이겠는가? 프랑스인과의 거래 도중 "너희들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말하는 아리카라 족장의 분노에 찬 말은 이 영화의 시선을 잘 드러낸다. 물론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균형을 잃지는 않는다.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지양(止揚)하고,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이냐리투 감독은 하나의 잣대로 '백인'을 설명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영화 속 '백인'이라는 카테고리 속에는 원주민을 향해 경멸과 증오를 쏟아내는 백인들도 있지만, 자신이 가진 먹을 것을 건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브리저(월 폴터)도 있고, 원주민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존재한다. 또, 이냐리투 감독은 원주민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인위적인 요소(신비로움이라든지 과장됨)를 제거하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무려 156분의 런닝타임만큼이나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양하고 풍성하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복수(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냐리투 감독은 '생존'에 천착(穿鑿)한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무엇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그가 죽음에서 돌아왔는가'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까?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남우주연상이란 남우주연상을 모조리 휩쓸고 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그의 이름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고 쓰고 싶진 않다)의 성실한 연기는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든다. 실화로 알려진 회색곰과의 전투신은 전율이 돋고, 살아 있는 물고기를 그대로 먹는다든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말의 내장을 빼내고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자는 장면들은 혀를 절로 내두르게 만든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글래스의 여정을 통해 자연은 물론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 경이로움과 새로운 발견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휴 글래스가 죽음의 경계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 그 회복을 통해 이냐리투 감독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 때문일까? 영화의 주된 홍보 주제인 '복수'는 부차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광활하고 압도적인 자연 앞에 인간의 복수는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피츠제럴드(톰 하디)를 향한 복수심이 휴 글래스를 마지막까지 이끌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부성(父性)'에 무게를 두고 싶다.


회색곰이 휴 글래스를 덮친 이유도 그의 총구가 자신의 새끼곰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카라 부족의 족장이 모든 백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복수를 위해 끝없는 추격을 계속하는 이유도 딸의 죽음에서 시작된 일 아닌가? 휴 글래스의 기적과도 같은 회복과 땅을 기고, 동물의 사체에서 골수를 빼먹는 처절한 여정이 경건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부성' 때문일 듯 싶다. 



"복수는 내가 아니라 신의 뜻대로"


분명 복수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지만,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웅장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미약함, 그러나 인간은 그 나약함을 뚫고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카메라를 응시(눈을 깜빡이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하며 숨소리를 내쉬는 휴 글래스 모습을 엔딩 장면으로 선택한 것은 이냐리투 감독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서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던 역사 속 발상의 전환, 개척의 동의어가 침략과 약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본다면,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유(思惟)'를 왠만큼 챙겼다고 할 수 있다. 최종 제작비 1억 3,500만 달러의 156분짜리 대서사시를 감상하는 건 후회 없는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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