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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냄의 미학과 리더에 대한 존중, '흑백요리사'가 준 깨달음

너의길을가라 2024. 9. 2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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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채소의 익힘 정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브로콜리의 익힘 정도가 훌륭하네요."


최근 각종 배달 플랫폼의 음식 리뷰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을 패러디한 것이다. 또, 각종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맛을 평가했다는 경험담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흑백요리사'의 인기를 실감하게 한다.

'흑백요리사'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셰프 '백수저'와 맛 하나는 최고라고 평가받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의 대결을 담은 요리 계급 전쟁이다. 최현석, 여경래, 최강록, 정지선, 에드워드 리 등 이름만 들어도 감탄을 자아내는 스타 셰프들과 철가방 요리사, 만찢남, 급식 대가, 이모카세, 장사 천재 등 실력만큼은 자신있는 신진 셰프들이 계급장을 떼고 맞붙었다.

현장은 전쟁터와 다름 없지만 불필요한 감정 싸움은 지양했다. 상대를 뛰어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량을 쏟아부으면서도 상호 존중과 예의를 바탕으로 한 저들의 '일기토'에 숙연해진다. 7화(총 12화)까지 공개된 '흑백 요리사'는 16일부터 22일까지 380만 시청 수를 기록해 비영어권 TV 시리즈 1위에 올랐다. 또, 주간 화제성 순위에서도 TV, OTT 콘텐츠를 통틀어 1위에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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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플릭스 '흑백요리사'

"내가 10년 동안 되게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달려왔다  생각했는데, 덜어냄의 미학을 몰랐다는 걸 오늘 진짜 너무 크게 깨달았어요." (장사천재)


전쟁터와 다름없는 '흑백요리사'에서 최고의 장면 두 개를 꼽아봤다. 흑수저 80인과의 대결에서 생존한 20명은 백수저와 1:1 대결에 돌입했다. 그 중 인상적인 매치는 통영식 비빔밥으로 백종원 심사위원의 입맛을 사로잡은 장사천재와 Olive '한식대첩2' 우승자 이영숙 셰프의 겨룸이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주재료 우둔살은 기름기가 적어 퍽퍽한 살이라 육회나 불고기 등 활용이 제한적이다.

장사천재는 조선 시대의 샤브샤브와 구이를 합친 요리인 '전립투골'을 준비했다. 커다란 전립투(전골을 끓여먹던 그릇) 위에 굴비, 육전을 비롯해 다양한 채소를 올려 푸짐한 한 상을 차렸다. 한식을 재해석하는 영리함과 맛을 재현하는 실력을 지닌 장사천재의 요리에 대한 열정이 돋보였다. 그는 "언젠가 대가를 뛰어넘어 보고 싶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고심했던 이영숙 셰프는 우둔살로 '미소곰탕'을 만들었다. 무, 표고버섯, 다시마, 들기름 등으로 뽀얀 국물을 냈고, 피를 뺀 우둔살로 미나리를 돌돌 말아 살짝 지진 후 그릇에 담았다. 완성된 미소곰탕은 소박함 그 자체였다. 장사천재의 전립투골이 화려함의 극치라면 이영숙 셰프의 요리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토록 극적인 대비가 또 있을까.

맥시멈과 미니멈으로 요약할 수 있는 대결의 결과는 이영숙 셰프의 승리(2:0)로 끝났다. 안대를 벗은 백종원은 요리를 바라보며 "뭐, 이렇게 차이가 나요?"라고 당황해 했고, 안성재 셰프도 드라마틱하다며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장사천재는 대결이 끝난 후 덜어냄의 미학을 몰랐다고 탄식했는데, 한 분야의 경지에 다다른 대가의 내공을 실감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팀 리더를 만들었다면 팀 리더를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팀 리더가 너무 고집스러울 때도 있지만 팀 리더를 믿어야 하니까 괜찮아요." (에드워드 리)

1:1 대결을 거친 '흑백요리사'는 팀전이라는 예상 밖의 미션을 제시했다. 첫 대결에서 흑수저 팀이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한 반면, 헤드 셰프들만 모인 백수저 팀은 의견 조율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력과 색깔이 워낙 강하다보니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 앞선 대결을 통해 팀장의 중요성을 절감한 백수저 팀은 리더로 최현석 셰프를 뽑은 후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30년 경력의 최현석 셰프는 과감하게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주방에서 셰프보다 더 높은 게 있"다며 재료를 선전하는 기민함을 발휘하고, 자신만의 레시피(가자미 미역국)'를 확고히 밀어붙이는 과단성도 보여줬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관자의 숫자를 잘못 계산해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고, 조리 방법에서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최현석은 자신을 믿어달라며 책임감을 드러냈다.

'2010 아이언 셰프' 우승자이자 백악관 국빈 만찬 셰프 에드워드 리는 그런 최현석과 자주 부딪쳤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그는 의견 충돌 시에도 리더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았다. 에드워드 리는 팀 리더를 만들었다면 믿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히며 최현석을 최대한 서포트했다. 앞서 리더 중심으로 뭉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16대 요리 명장 안유성, 이영숙 등도 완벽한 팀워크를 보여줬다.

경연 프로그램답게 '흑백요리사'는 재야의 숨은 고수들이 맹활약하며 스타 셰프들을 떨어뜨리는 쾌감도 선사하지만, 수십 년의 경력을 지닌 명인들의 진가를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를 감탄시키기도 한다. 관록이란 이런 것일까. 자존심이 걸린 승부 앞에서 덜어냄의 진수를 보여준 이영숙 셰프나 경력이나 사회적 명성이 더 높음에도 (그 자격을 상실했다는 판단이 들기 전까지는) 리더의 권위를 존중하며 묵묵히 관자를 자르고 익히던 에드워드 리의 모습에서 인생의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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